작년 4월 발목을 다친 이후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발목이 낫지 않아 걸을 때마다 통증을 느꼈다. 발목 통증으로 출퇴근을 택시로 해야 했고 운동을 못해서 생기는 답답함이 컸다. 대학병원과 유명 재활 병원, 수술 전문 병원 등을 1년 넘게 찾아다니며 발목 통증을 해결하기 위해 애썼던 시간들은 매우 길고 지난했다. 많은 돈과 시간, 노력을 쏟아붓고도 발목은 좋아지지 않았고 뚜렷한 원인을 알지 못해 답답했다. 그러다 지인의 소개로 찾은 재활 전문 센터에서 마침내 답을 찾았다. 답은 운동의 중심이 되는 축(軸)을 몸이 다시 인지하게 하고 이를 연결하고 회복하는 일이었다. 나는 평소 습관과 그동안의 여러 부상 등의 보상 작용으로 걸을 때 중심축이 되는 엉덩이 근육과 고관절 등을 쓰지 않고 아픈 발목에 지나친 힘을 실어서 걷고 있었다. 움직임과 운동의 중심이 되는 축에 문제가 있었으니 아무리 발목 재활 운동을 하고 치료를 받아도 소용이 없었던 것이었다.
물리적 의미에서 축(軸)은 모든 운동이 그 주위를 돌며 질서를 유지하는 기준선이다. 축은 질서를 부여하는 선이고, 운동의 중심을 이루는 고정된 기준이다. 그래서 어떤 일이든 이 축을 파악하면 본질과 탁월함에 빠르게 이를 수 있다. 내게 축의 개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알려주신 교수님은 골프를 할 때도 골프가 축을 중심으로 한 회전 운동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후 실력이 크게 늘었다고 한다. 내가 발목을 다치고 회복했던 경험을 생각해 보면, 운동의 중심이 되는 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해서 많은 시간을 잘못된 문제를 탐색하고 해결하는데 보냈다. 발목이 좋아지지 않던 시기에는 발목에 대해서만 온갖 검사와 재활 운동, 치료를 진행했었다. 하지만 운동의 축을 회복하는 재활을 할 때는 중심 축을 깨우고 살리기 위해 오히려 발목과 허벅지, 종아리 등 중심 축이 아닌 다른 근육의 힘을 빼고 축에 대한 감각을 느끼는 연습을 꾸준히 했다. 그렇게 중심 축이 살아났고 나는 이제 편히 걸을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이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된 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많은 문제들을 마주할 때 축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거나 축이 어떤 상태인지를 인지하지 못하면 올바른 답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물리적 운동뿐 아니라 모든 일과 현상에는 축이 존재한다. 생각해 보면 나는 이 축을 중심으로 세상과 문제를 잘 생각해보지 않았기에 생긴 문제가 많았다. 반면 여러 일들이 자연스럽게 잘 풀리고 내가 바른 행동을 하게 되고 좋은 선택들을 잘 만들어나갔던 상황들에는 당시에는 인식하지 못했지만 축이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짐작하고 행동했던 때였던 것 같다.
얼마 전 몇 년간의 연애를 아프게 끝내면서 결별의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결정적으로 무너졌던 이유는 오랜 기간 지속되었던 연인의 깊은 슬픔과 우울을 옆에서 받아내고, 치유하고, 응원할 수 있는 힘이 이제는 더 이상 내게 남아있지 않음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오래된 깊은 우울을 지켜보고 경험하며, 함께 슬퍼하고 함께 깊은 어둠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 앞에서 이제는 고갈되어 무기력한 나를 발견했고, 몇 년의 시간 동안 내가 모두 소진되었다고 느꼈다. 사랑의 힘으로 모두 극복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오랜 시간 믿어왔지만 내가 가진 사랑의 힘은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한 사람을 구원할만큼 크고 대단하지 않았다. 헤어짐 후에 한강의 책을 읽으면서 내가 절망할 수밖에 없었던 사랑에 대해서 생각했다. 우리는 다른 존재를 어디까지, 얼마나, 언제까지 사랑할 수 있는 걸까. 사랑의 한계는 어디이고 무엇일까. 사랑이 소명인 삶을 살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고쳐야하고 어떻게 나아져야 할까.
나는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관계 속에 있었을 때는 보지 못했던 사랑의 축에 대해서 생각했다. 이 관계에서, 사랑에서 사랑을 오래도록 지속가능하게 할 수 있는 축은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누군가를, 또는 사랑할만한 그 무언가를 사랑할 때 오랫동안 진실된 마음으로 헌신하며 깊이 사랑할 수 있게 하는 사랑의 축은 무엇일까. 이번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오답이 있다면 사랑의 대상은 사랑의 축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의 유일한 기준이 되었을 때는 그 사람의 세상이 흔들리고 무너질 때, 나의 세상도 함께 비틀거리고 흔들리고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여러 번 무너졌을 때 나는 무너지는 내 세상을 보면서도 사랑은 슬픔 또한 함께하는 것이기에 당연히 이것도 감내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사랑의 축이 무엇인지 생각하지도 못하고 나는 결국 내가 버틸 수 없는 한계에 와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온 진심을 다해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절망하지 않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기 위해서, 더 크고 높은 사랑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를 가능하게 하는 사랑의 축은 무엇일까. 내가 이른 결론은 사랑의 주체인 나 자신이 사랑의 축이 되어야만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사랑을 계속해서 해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아끼고 귀하게 여기지 않는 상태에서 자신을 고갈시키고 소진하는 방식으로서의 사랑은 그 대상이 사람이든 일이든 세상이든 지속가능하지 않았다. 나는 지난 연애에서도, 일에서도 사랑을 오랫동안 이어나갈 수 있는 사랑의 축이 나 자신인 것을 모르고, 스스로를 소진시키는 상황에 두었다. 그리고 축이 무너졌을 때 사랑을 더 이어나갈 수 없었다. 이제는 축을 알고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사랑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