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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식성 염소 Sep 05. 2024

그 땐 재미없었고 지금은 아니다

영화 카모메식당

내 또래 친구들의 학창시절에는 학교가 영화관이 되었던 기억이 (아마 거의 모두) 있을 것이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방학이 되기 전, 봄방학 등 더 이상 나갈 학습 진도는 없지만 학교는 나와야하는 시기. 밀린 교육을 듣거나 영화를 보거나 체험학습을 가는 기간으로 사실상 학교를 놀러갔던 그 시기. 수능이 끝나기 전 나의 학창시절엔 그 시기가 가장 영화를 많이 접하게 되는 때였다. 영화는 보통 선생님이 준비하시거나 아니면 반에서 가장 불법 유통 경로에 능한 친구가 준비하곤 했는데 (그 시절엔 지금처럼 저작권 의식이 투철하지 않아 온갖 불법 다운로드가 판을 쳤다.) 중고등학교 통틀어 가장 임팩트가 컸던 영화가 있다. 


카모메식당


앞서 말했듯 영화는 선생님이나 학급친구가 준비했는데 대부분 코미디 영화나 수업에 연관된 주제를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아이들이 보고싶어하는 것들이었다. 19금 영화도 있었으니 뭐. 근데 19금 영화보다 왜 카모메식당이 기억에 남았냐면 정말 너무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 영화를 준비해오셨던 선생님의 성함과 얼굴은 선명하지 않지만 자신은 이런 잔잔한 영화를 좋아하신다며 너무 같이 보고싶다고 하셨던 기억은 남아있다. 그러나.. 그 시간만큼은 영화관이 아니라 수면실이 되었다. 진짜 모두가 잤다. 너무 재미가 없어서.


나는 동아리 활동 때문에 깨어있었는데, 선생님이 민망하실까봐 (진짜 나 빼고 다잠) 잠깐 대화를 나누었었다. 잠자는 교실 속 아이들을 보며 선생님은 자신은 너무 재밌는데 왜 다들 자는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사실 나도 재미가 없어서 동아리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말할 수  없어 '그러게요'라고 답했었다. 아직도 카모메식당 영화와 잘 어울리는 오후의 따스한 햇빛이 쏟아져 내리던 그 교실의 그 순간이  떠오른다. 


시간이 흘러 직장인이 된 어느날,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월급루팡을 하다가 '카모메식당'이 많은 사람들에게 추천작으로 꼽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재미없던 영화 중 하나였는데 추천작이라니. 사실 다시 볼만큼의 용기는 나지 않아서 처음엔 영화 소개를 다시 찾아봤고 사람들의 후기를 읽어보다가 OTT로 다시 관람했다. 심지어 또 재미없을까봐 처음엔 빨리감기로 봤다.


그리고 더 솔직하게 말하면 여전히 나에게는 크게 재밌는 영화는 아니었다. 다만 어렸을 때 보다는 조금 더 볼 만 했을 뿐이다. 핀란드에 오픈한 작은 동네 식당, 그 식당에 방문한 사람들의 이야기. 너무 잔잔하디 잔잔하여 사건사고가 사건으로 안보이는 그런 영화. 다만 내가 볼만해졌다고 느낀건 어른이 되어서야 공감할 수 있는 몇몇 대사들 때문이었다. 


'좋아 보여요, 하고 싶은 일 하고 사는거.'
'하기 싫은 일을 안 할 뿐이에요'
'세상 어딜가도 슬픈 것은 슬픈 것이고 외로운 사람은 외로운 법이잖아요'


꿈많고 공상 가득했던 학창 시절엔 표면적 공감만 가능했지만, 가끔 아니 자주 현실에서 도망가고 싶어지고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고 싶고 나를 복잡하게 하는 것들에서 벗어나고 싶은 어른이 되어서는 그냥 내 말 같았다. 영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보면 소소하디 소소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사건도 내가 실제로 겪으면 죽을만큼 힘들다는 것도 알고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 것도 알기에 그들의 식당은 그 때보다 볼만해진 것이다. 그러니까, 내 취향이 바뀌어 재밌어진게 아니라 마음 깊이 그들의 잔잔함에 대해 공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내 취향이 아니어서 사실 글을 쓰면서도 나의 후기가 편견이 될까봐 걱정했다. 누군가에게는 나의 학창시절 선생님처럼 '카모메식당'이 인생영화일테니 말이다. 혹시, 잔잔한 영화가 취향이라면 어른이 되어서야 내 말처럼 들리는 대사들에 공감하고 싶다면 오늘 저녁엔 맥주가 아니라 커피 한 잔을 내려 카모메식당을 틀어보는 걸 추천한다. 영화를 다시 본지도 시간이 꽤 흘렀지만 저 대사들이 내게 남아있는 것을 보니, 나 예상보다 재밌게 봤던 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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