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의 뜻

by 이단아

현장에 박스가 없다. 지게차에 올라탄다. 파렛트 위에 실린 물건을 1톤 봉고 트럭 위에 사뿐히 올린다. 다리가 짧아 손잡이를 꼭 잡고 트럭에 올라탄다. 시동을 걸고 천천히 조립 현장으로 간다. 다시 지게차에 올라타 박스를 내려 준다. 10년차 제조업체 사장은 지게차도 몰고, 트럭도 운전하고, 25kg짜리 원료 포대를 맨몸으로 든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는 정신으로.


아빠의 부름으로 제조업에 발을 들였을 때 나는 경영학을 전공한 스물다섯 살짜리 사회 초년생이었다. 작은 중소기업에서 이것저것 경험하기에 나쁘지 않은 공간이었다. 책에서 배운 말들이 현장에서 쓰이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신기했고, 대기업 총수가 경영수업을 하듯 언젠가 너의 사업을 펼치려면 실무부터 알아야 한다는 아빠의 말에 가슴이 웅장했다. 하지만 설렘은 얼마가지 못했다.


회사가 점점 어려워졌다. 나는 여러 사람의 몫을 해야 했다. 현장의 조립사원이 되어야 할 때도 있었고, 집에서 손이 많이 가는 부자재를 포장해야 할 때도 있었고, 디자인이나 정부사업 지원, 심지어 회생까지도 아무것도 모르지만 누군가에게 의뢰하면 돈이 많이 드는 일도 배워서 처리 해야 했다.


“내가 이런 것까지 해야 해요?”

그럴 때마다 아빠는 같은 말을 했다.

“시키려면 할 줄 알아야 해. 모르고 시키는 거랑 알고 시키는 거랑은 전혀 다른 거야. 다 네 자산이 될 거다.” 그때 나는 속으로

‘아빠는 이거 알아봐라 저거 해봐라 다 시키면서, 지금 나한테 시키는 것도 다 할 줄 모르면서…’

라고 툴툴거렸다.


그때는 모르던 아빠의 뜻을 지금은 알 것 같다. 어떤 일이 닥쳤을 때 “이 건 제 일이 아닌데요, 할 줄 몰라요”라며 한 발 물러나지 말라는 것이다. 거기서 그만두지 말라는 것이다. 시키는 일만 하는 것은, 할 줄 아는 일만 하는 데서는 배움도 성장도 없다는 걸 몸으로 알라는 말이었다. 그러니 두려워 말고 도전하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아빠는 중졸이면서 기업의 상무까지 올랐고 사출을 전혀 모르는 데 사출 공장을 지었고, 공장의 기계가 망가지면 직접 용접을 했다.


10년이 지나 내게 남은 건 그 모든 것들을 잘 하는 능력은 아니다. 여전히 무엇을 특별하게 잘 하는 것은 없다. 대신, 일단 내가 해봐야 한다는 정신은 무엇이든 해보고서 못 하겠다 싶을 때 다른 방법을 찾아보거나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으로 존재한다.


<시대예보>의 송길영 작가는 앞으로의 세상은 시킬 줄만 아는 관리를 위한 관리자는 모두 사라질 거라고 말했다. 배움에 대한 투자도, 그를 통해 얻는 성취도 짧은 주기를 가진다고 했다. 그런 세상에서 배우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일단 해보는 사람은 생각보다 큰 자산을 가진 사람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현장에 박스가 없으면 지게차에 오른다. 할 줄 알아서가 아니라, 그 자리에 내가 있기 때문이다. 할 줄 모른다는 이유로 한 발 물러서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 “시키려면 할 줄 알아야 돼.” 그 말의 뜻은 모든 걸 잘하라는 말이 아니었다. 모른다는 이유로 삶에서 도망치지 말라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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