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부 한 달 살이 2일 차 ‘현지화 패치 완료’
세부의 일요일 아침은 전날과 다르게 흐린 모습이다.
어학원 마당으로 나가보니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공용 공간인 ‘화이트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고양이라면 어쩔 줄 몰라하던 딸아이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은 존재였다.
이 어학원에는 터줏대감 같은 고양이 세 마리가 살고 있다고 했다. 그중 이 친구의 이름은 까미. 같은 검은색 고양이지만 꼬리가 짧은 아이는 깜까미, 그리고 태어난 지 2년밖에 되지 않은 밍키. 밍키는 어린 나이에도 두 번의 임신과 출산을 겪은 엄마 고양이라고 했다.
어색함으로 굳어 있던 딸아이의 마음을 까미와 밍키가 풀어주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외출 준비를 하는 동안, 바깥에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숙소 밖으로는 휴대폰을 가지고 나올 수 없다는 규정 때문에, 아이들은 저마다 휴대폰을 대신할 놀이 방법을 찾아낸 모양이었다.
디지털 없이도 충분히 즐거운 얼굴들.
아날로그 하게 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엄마 얼굴에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오늘의 목적지는 어제 미처 출금하지 못한 페소를 뽑기 위해 어학원에서 30분 거리의 아일랜드 센트럴 몰(ICM Mall)에 가기로 하였다.
보통은 달러를 가져와 현지에서 페소로 이중 환전을 하지만, 요즘은 트래블 카드가 잘 되어 있어 수수료 없이 환전과 결제가 가능하다. 최근 환율이 좋지 않아 나는 후자를 택했고, 수수료 없이 출금 가능한 은행이 ICM 몰에 있어 아이와 쇼핑도 할 겸 나서기로 했다.
이동 수단으로는 에어컨이 나온다는 저렴한 화이트 버스를 탈 생각이었다. 그런데 툭툭이 아저씨가 우리 모녀를 붙잡고 어딜 가느냐고 묻는다.
툭툭이는 요금으로 장난을 치는 경우가 있어 후보에서 제외했던 터라 경계심이 먼저 들었다.
“ICM 몰에 가요. 화이트 버스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랬더니 갑자기
“지프니! 지프니!”
라고 외치며 지나가던 지프니를 세우는 게 아닌가. 그리고는 ICM 몰까지 간다며 어서 타라고 했다.
이렇게 친절한 사람을 의심하고 있었다니.
한국에서 ‘과잉 친절’이 범죄로 이어지는 장면들을 너무 많이 보아왔던 탓일까. 이곳에서는 잃어버렸던 인류애를 조금씩 되찾는 기분이었다.
매연은 심했지만, 창 없이 시원하게 뚫린 공간을 달리며 바람을 맞는 기분은 어릴 적 시골 할머니 댁에서 경운기를 타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지프니에 탄 현지인들은 코리안 모녀가 신기한 듯 바라보다 눈이 마주칠 때면 환하게 웃어주었다.
지프니의 요금 지불 방식도 인상적이었다. 앞자리에 앉은 승객에게 요금을 건네면, 손에서 손으로 기사님에게 전달된다. 거스름돈도 같은 방식으로 뒤로 전달된다. 누군가 거스름돈을 슬쩍하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이 들었지만, 그 짧은 이동 시간 동안 오가는 돈에는 단순한 화폐 이상의 신뢰가 담겨 있는 듯 보였다. 한국에서 잊고 지냈던 ‘정’과 이웃 간의 교류가 문득 떠올랐다.
그랩으로 오면 300페소(약 7,500원)가 드는 거리를, 딸과 둘이 38페소(약 930원)에 왔다. 이렇게 착한 이동 수단이 있다니.
게다가 우리가 길을 잃을까 봐 모두가 한마음으로
“여기가 ICM 몰이야”라고 알려주는 상황까지.
괜히 마음이 따뜻해졌다.
필요한 돈을 뽑고, 오늘은 어제 고생한 딸을 위해 원하는 건 다 해주는 날로 정했다.
평소 한국에서는 절대 허락하지 않을 인형 뽑기부터 아보카도 인형까지 구매까지. 물가가 아주 싼 건 아니었지만,
‘이러려고 여행 오는 거지.’
하며 오늘만큼은 마음을 넉넉하게 쓰기로 했다.
목이 마르다는 아이를 데리고 말레이시아 커피 브랜드라는 ZUS Coffee에 들렀다. 아이는 필리핀의 자색고구마라는 우베 프라페를, 나는 110페소짜리 카페라테를 주문했다. 필리핀은 커피 맛이 없기로 유명하다는데 생각보다 저렴한 가격에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건 친환경 녹말 빨대.
단점이라면, 입에 닿을 때마다 자꾸 녹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환경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 불편쯤은 감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피곤함과 약기운 때문인지 아이는 음료가 나오기도 전에 테이블에 엎드려 곤히 잠들어 버렸다.
컨디션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을 텐데, 엄마를 쫄래쫄래 따라다니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30분 정도의 단잠을 자고 일어난 아이의 표정은 한결 나아 보였다.
그리고 우리는 몰 안에 있는 맹인 마사지를 받아보기로 했다. 누워서 받는 마사지는 아니었지만 가격이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아이는 상체 마사지, 나는 다리 마사지. 각각 30분씩.
140페소, 우리 돈으로 약 3,500원이다.
‘이 가격에 이렇게 시원해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현지인들 사이에서 의자에 앉아 마사지를 받고 있으니 벌써 이곳 사람이 된 것 같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작은 몸을 마사지사에게 맡기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또 얼마나 귀엽던지.
몰에서 나와 어학원 근처 세이브 몰에 들러 간단히 먹을 저녁거리 장을 보기로 했다.
물론 돌아가는 길에도 지프니를 타고.
지프니 안에서 기사님께 영어로 얼마냐 묻는 나에게 대각선에 앉은 꾸야 삼촌이 한국어로
“십팔 페소, 둘이 서른여섯 페소“라고 알려주었다. 십팔 페소야 그렇다 쳐도 삼십 육이 아닌 서른여섯이라는 한국어를 구사하는 필리핀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계획하지 않은 것에서 비롯된 뜻밖의 상황들이 나를 더 신나게 만들었다.
갈 때와 달리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비 오는 필리핀의 풍경도 볼거리가 다양했다. 현지인들 사이에 섞여 이 일상을 함께 누리는 경험, 내가 한 달 살기가 아닌 단순한 여행에서도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었을까?
무엇보다 필리피노들의 순수한 미소와 친절함.
낯선 나라, 낯선 사람들이 우리 아이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필리핀 사람들은 너무 친절해서 좋아.”
아이의 이 한마디가 오늘 하루를 정리해 주는 말 같았다.
장 봐온 산미구엘 맥주와 과자를 꺼내니 하루의 피로가 서서히 녹아내린다.
하는 것 없이 바쁘지만 현지인들과 동화되어 사는 삶.
큰 이벤트가 없어도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곳에서 두 번째 밤이 저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