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부 한 달 살이 4일 차 '언어의 장벽 마저 좋다'
26년 1월 6일 필리핀 세부의 하늘.
아이도 어제보다는 긴장이 풀린 얼굴로 제법 씩씩하게 수업을 들으러 들어갔다. 교실 문이 닫히는 걸 보며 오늘은 나도 아이를 기다리는 사람에서 이곳을 직접 살아보는 사람으로 한 발 더 나아가 보기로 했다.
아이 수업 시간 동안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며 탐방을 하기로 말이다.
가장 먼저, 과일 가게에 가보기로 했다. 필리핀은 말 그대로 과일 천국이다. 바나나, 망고, 파인애플, 코코넛 등등. 이 신선한 과일을 직접 사 먹는다면 얼마나 더 맛있을까? 어학원 동기 어머님께 근처 과일이 괜찮다는 곳을 추천받아 길을 나섰다.
전날 들은 시세는 망고 1kg에 140페소.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3,500원 남짓이다. 한국에서는 망고 한 개 값으로 이곳에서는 아이에게 과일을 마음껏, 실컷 먹일 수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리만치 나를 들뜨게 했다.
지프니를 타고 스쳐 지나갈 때는 보이지 않던 풍경들이 걷기 시작하니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길가에 앉아 있는 사람들, 느릿하게 지나가는 오토바이, 가게 앞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
쨍한 하늘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기 때문이었을까.
땀이 줄줄 흐르는 더위 속에서도 묘하게 상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이웨이로 10분쯤 걸었을까. 어학원 동기 어머님이 말해주셨던 과일 가게가 보였다. 이미 한국 사람들이 많이 다녀간 곳인지 친절하게도 한국어 메뉴판이 붙어 있었다.
오늘은 어제보다 가격이 조금 올랐다고 했다. 아쉽긴 했지만 이 정도 가격에도 감사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망고 2kg와 한국에서는 제대로 먹어본 기억조차 없는 망고스틴 1kg. 장바구니가 금세 묵직해졌다.
과일을 든 김에 왔던 길 쪽으로 다시 걸어 한국 물건을 판다는 더마트에도 들러보기로 했다. 어제 마트에 들렀다가 깜빡 잊었던 선크림도 사고, 이곳에서는 어떤 물건들이 필요해질지 슬쩍 구경도 할 겸.
하늘은 유난히 쨍했고 구름은 그림처럼 떠 있었다. 그 풍경 덕분에 이 더위마저도 견딜 만하다고 느껴졌다
더마트는 24시간 운영된다는 곳이라 한국에서 이것저것 바리바리 싸 오지 않아도 한 달 살이 생활은 충분히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는 애초부터 먹는 것만큼은 현지에서 해결하겠다는 마음으로 왔기에 라면이며 간식이며 한국에서 익숙한 맛들을 굳이 챙겨 오지 않았다.
여행이란, 편리함을 그대로 옮겨오는 일이 아니라
그 나라의 음식을 먹어보고 그들의 일상 속으로 잠시 들어가 보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에.
낯선 맛에 놀라고, 입에 맞지 않아 고개를 갸웃하기도 하고, 의외로 자꾸 생각나는 맛을 만나기도 하면서
그 나라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는 것. 나에게 여행은 늘 그런 방식이었다.
아이에게도 한국에서 늘 먹던 것들 대신 이곳의 과일을 손으로 집어 먹고, 처음 보는 음식 앞에서 망설였다가 한입 베어 무는 경험이 공부보다 먼저 와닿는 배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왕 나온 김에 날씨도 이렇게 좋은데 나는 조금 더 걸어보기로 했다. 운동 삼아, 생각 정리 삼아.
뉴타운 방향으로 걸어가다 보면 짝퉁 크록스를 파는 시장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곳에서 편하게 신을 신발도 사고 아이 슬리퍼도 하나 장만할 겸 발길을 그쪽으로 돌렸다.
걷는 동안 사방에서 따갈로그어가 흘러들어왔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 속을 지나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지금 내가 이렇게 편안한 이유는 이곳에 스트레스 요인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나에게까지 도달하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한국에서는 옆 사람이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하루 종일 마음에 걸리곤 했다. 의도를 헤아리고, 뉘앙스를 곱씹고, 밤이 되어도 그 말을 다시 떠올리며 스스로를 괴롭혔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누군가 무슨 말을 하든 그 말은 내 귀에서 멈춘다. 의미로 번역되지 못한 채 소음처럼 흘러가 버린다.
언어의 장벽은 불편함이기도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나를 지켜주는 방패처럼 느껴졌다.
설령 이곳에서도 날카로운 말이나 불편한 시선이 있었을지라도 그것이 내 마음까지 닿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고맙게 느껴졌다.
내가 가진 한계 덕분에 상처받지 않아도 되는 시간. 알아듣지 못함으로써 지켜지는 평온이 있다는 걸 이곳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엔 처음으로 툭툭이를 타보기로 했다. 150페소를 부르는 꾸야를 향해
“No money. I only have 50 peso. “라고 하자 150페소가 50페소가 되는 기적도 경험하면서.
땀에 흠뻑 젖은 채 어학원으로 돌아와 서둘러 샤워를 했다. 물줄기가 피부를 타고 흐르자 이 더운 하루가 비로소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방 한편에는 아이에게 보여주려고 챙겨 온 오늘의 수확물들이 놓여 있었다. 망고와 망고스틴. 아이가 어떤 얼굴로 기뻐할지 벌써부터 그 표정이 그려졌다.
차가운 산미구엘 한 캔을 꺼내 조용히 한 모금 들이켰다. 이런 게 무릉도원이지.
오늘은 Science 수업이 있었나 보다. 밝은 표정으로 본인 결과물을 자랑하는 귀여운 녀석
오늘도 물개처럼 수영장으로 뛰어든 아이. 망설임 없는 입수에 나는 또 한 번 웃음을 삼킨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언어와 풍경 속에서 아이도 나도 각자의 방식으로 하루를 잘 건너왔다.
엄마인 나에게도, 이 시간을 살아내고 있는 너에게도
오늘이 오래 기억될 만큼 뿌듯한 하루이길.
그리고 내일도 우리는 이렇게 조금씩 성장하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