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장이 살인 동기를 물었다. 뫼르소는 해변의 햇빛이 너무 눈부셔 사람을 죽였다고 답했다. 평론가들은 뫼르소의 행위를 '부조리'라고 했다.
<이방인>, 알베르 까뮈
뫼르소는 햇빛이 눈을 부시게 해서 사람을 죽였다고 했다. 평론가는 그를 부조리하다며 비난했다. 정말 부조리한 것은 뫼르소일까? 오히려 그가 매우 정직하여 기존 질서에 금을 가게 한 것은 아닐까. 뫼르소는 사회 규범과 인간의 기본 감정에 무관심한 죄로 타인의 시선에 의해 이방인으로 추방되고 만다. 작금의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면서, 과연 우리가 뫼르소보다 나은 게 뭐가 있는지 찾아보자.
아이를 낳지 않는 사회가 저출산을 걱정하는 모순
합계 출산율이 0.7명 대에서 더 오르고 있지 않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저출산 쇼크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정부는 예산을 쏟아붓고 정책을 만든다. 하지만 정작 아이를 낳아야 할 세대는 "당신이라면 이 지옥에 아이를 낳을 마음이 있는가?"라고 묻는다.
청년들은 취업난에 시달리고, 집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 아이 하나 키우는 데 드는 사교육비만 수천만 원이 든다고 한다. 그런데도 사회는 "출산하라"고 다그친다. 마치 불타는 집에 들어가라고 강요하는 모양이다. 뫼르소라면 어떻게 말했까? 저출산의 원인을 만든 사회가 저출산을 걱정하는 모순도 유만부득이다.
투명성을 요구하는 사회의 불투명한 권력
가장 큰 사회 문제 중의 하나는 '투명하지 못한 사회'이다. 시민들은 정부 기관이나 지자체 투명성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 요구 자체가 부조리가 아닐까. 애초에 투명해야 할 권력이 투명하지 않았다는 데서. 그리고 지금까지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온 사실에서.
공공기관 채용 비리, 정치인 특혜 논란, 기업과 정치의 유착. 이런 일들이 드러날 때마다 사회는 분노한다. 하지만 곧 잊는다. 그리고 다음 비리가 터지면 또 분노한다. 마치 시지프스가 바위를 굴리듯 반복되는 패턴이다.
뫼르소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왜 투명하지 않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투명성을 기대하죠? 그들이 투명했다면 애초에 그런 자리에 있지 않았을 텐데요." 권력의 본질을 은폐하면서 투명성을 요구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현대적 부조리가 아닐 수 없다.
경쟁을 강요하는 사회가 연대를 말하는 역설
입시경쟁 과열로 인한 교육 문제가 심각하다고 한다. 사교육비 부담, 교육 불평등, 학생들의 정서불안. 모두가 문제라고 떠들어댄다. 하지만 아무도 그 경쟁에서 빠져나오려고 하지 않는다.
"다 같이 사교육을 안 받으면 되잖아요." 누군가 이렇게 말하면 다들 고개를 끄덕이지만, 정작 자기 아이만은 뒤처질까 봐 학원에 보낸다. 집단에서는 경쟁의 폐해를 알지만, 개별로는 경쟁에서 이기고 싶어 한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지경의 사회에서 '공동체', '상생', '연대'를 내세운다는 것이다. 경쟁이 일상이 된 사회에서 연대는 일어날 수 없다. 옆사람이, 내 이웃이 경쟁자인데 손을 잡자고 할 수 있겠는가.
까뮈가 본 부조리와 우리의 부조리
까뮈의 뫼르소는 사회의 위선을 거부했다.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고, 어머니가 죽은 다음 날 연인과 영화를 봤다. 사회가 요구하는 '적당한 슬픔'을 연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부조리하다고 단죄받았다.
하지만 진짜 부조리는 뫼르소를 단죄한 사회에 있었다. 형식적인 애도를 강요하고, 진실한 감정보다 사회적 예의를 중시하는 사회. 개인의 정직보다 집단의 위선을 선호하는 사회.
우리 시대의 부조리는 더 교묘하다. 개인에게 책임을 떠넘기면서 구조적 모순을 은폐한다. 아이를 낳지 않는 개인을 비난하면서 아이 낳기 힘든 사회는 그대로 둔다. 투명성을 요구하면서 불투명한 권력구조는 용인한다. 경쟁을 일상화하면서 연대를 외친다.
뫼르소는 최소한 정직했다. "햇빛이 눈부셔서 죽였다"고 말했다. 거짓된 동기를 둘러대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부조리한 현실을 정당화하기 위해 온갖 그럴듯한 이유들을 갖다 붙인다. 진정한 부조리는 부조리를 부조리라고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뫼르소라면 우리에게 이렇게 물을 것이다. "당신들은 정말 이 모순들을 모르나요? 아니면 모른 척하는 건가요?"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뫼르소 같은 정직일지 모른다. 위선적인 해결책 대신 문제를 문제라고 부르는 용기. 그것이 부조리에 맞서는 첫걸음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