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_005]양심이라는 부조리

by 여상욱

1980년 5월 27일 광주를 지키다 계엄군의 총탄을 맞고 숨진 고 박용준 열사 일기 마지막에 "하느님, 왜 나에게 양심을 주어, 나를 찌르고 아프게 합니까? 그런데 나는 살고 싶습니다"라고 썼다. 그는 전남도청에서 시민군으로 싸우다 죽었다. 살고 싶었지만 양심이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사람 사는 세상의 가장 근본적 부조리가 아닐까? 살려고 발버둥치는 인간에게 주어진 양심, 때로는 목숨보다 더 소중하다면서 삶을 포기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다.


양심의 역설

한강 작가는 20살에 일기를 쓰면서 "어떻게 현재가 과거를 돕고, 어떻게 산 자가 죽은 자를 도울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논리가 통하지 않는 엉뚱한 물음이다. 죽은 자는 이 세상에 없고, 과거는 이미 지나갔다. 지금 행동으로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양심은 논리를 넘어선다. 죽은 자를 기억하면서 지나간 고통을 현재로 불러와 아파한다. 과거 일을 책임지려고 하면서,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려고 애쓴다.

현실에서 보면 비효율의 끝점이다. 이미 지나간 일에 힘을 쏟는 것보다 앞으로 나아가는 데 집중하는 게 합리적이다. 하지만 양심은 합리를 기꺼이 버린다. "너는 기억해야 한다. 너는 증언해야 한다. 너는 그들의 몫까지 살아야 한다"고 낮지만 당당하게 말한다.


살고 싶은 자의 딜레마

모든 유기체는 본능적으로 살고 싶어 한다. 생존 본능은 가장 원초적이고 강렬한 욕구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이 본능을 거스르게 만드는 어떤 것이 있다. 바로 양심이다. 세월호 참사 때 끝까지 학생들을 구하려 했던 교사들, 코로나19 팬데믹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환자를 돌본 의료진들, 지난해 12.3 계엄에 맨몸으로 맞섰던 시민들. 그들도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안전하고 편안한 삶을 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양심이 그들을 다른 길로 이끌었다. 나보다 더 약한 자, 나보다 먼저 죽어간 자, 나보다 더 고통받는 자를 위해 자신의 안전을 포기했다. 이게 부조리가 아니면 무엇인가? 살기 위해 태어난 존재인데, 스스로 살기를 포기하다니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무관심이라는 현실주의

그렇다면 양심을 무시하고 사는 게 현명할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간다. 남의 일에 끼어들지 않고, 나만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한다. 지나간 아픔은 과거의 몫이고, 현재는 현재대로 살아가면 된다고 여긴다.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일 수도 있다. 양심의 짐을 지지 않으면 훨씬 가볍게 살 수 있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하지 않으면 내 마음도 평안하다. 세상의 불의에 분노하지 않으면 스트레스도 적다. 하지만 이런 무관심이 만드는 세상은 어떨까? 박용준 열사 같은 사람이 없었다면, 한강 작가 같은 사람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는 인간 세상에 살아간다고 할 수 있을까?


양심의 존재 이유


아마도 양심은 개인의 생존을 넘어서는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인간다움이라는 것, 공동체나 연대라는 것, 정의라는 것. 이런 가치들은 개별 생명보다 더 오래가고 더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박용준 열사의 죽음이 헛되지 않은 것은 그의 양심이 후세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한강 작가의 고민이 노벨상 위원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그 고민을 통해 과거의 아픔이 현재로 소환되었기 때문이다. 산 자가 죽은 자를 기억할 때, 현재가 과거를 위로할 때, 시간을 초월한 연대가 일어난다.


부조리 껴안기

양심이라는 부조리는 인간이 단순한 생물학적 존재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증거이다. 우리는 개체의 생존을 넘어서는 가치를 추구하는 존재다. 때로는 그 가치가 생명보다 소중하다고 여기는 존재다. 이것이 어리석은 생각까? 비합리적인 일일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어리석음과 비합리성이 없었다면 인류는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안전만 생각하는 자들로만 이루어진 세상에서는 진보도 연대도 불가능하다.


양심은 부조리다. 살고 싶어하는 존재를 죽음으로 이끌기도 하고, 현재를 사는 사람에게 과거의 짐을 지우기도 한다. 하지만 이 부조리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다. 박용준 열사는 양심 때문에 죽었지만, 그의 양심은 살아남았다. 한강 작가는 불가능한 질문을 품고 살지만, 그 질문을 통해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난다. 이것이 양심이 불러일으키는 기적이다. 부조리하지만 아름다운, 비논리적이지만 숭고한 기적이라고 얼마든지 부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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