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권리가 있는가 / 채형복
자식처럼 소를 기르던 농부의 아내가 울면서 말한다. "수의사들이 하얀 옷을 입고 소 사육장에 들어서니 소들이 모두 긴장을 했다. 마취제를 맞고 하나 둘 쓰러지는데, 제 자식인 송아지가 마취제를 맞고 쓰러지는 모습을 본 어미소가 그만 그 자리에서 콱 죽어버리데요. 제 자식이 죽는 모습을 보고 마취제를 맞지도 않은 그 어미 소가 그만 확 죽어버린 거라요."
시 한 구절을 갖고 와서 나름대로 풀어본다.
어미 소는 마취제를 맞지도 않았는데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었다. 제 새끼가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마취제를 맞고 쓰러지는 것을 보고서.
생명을 숫자로 부르는 세상
"200만 마리 살처분 완료." 구제역이 돌 때마다 뉴스는 감정을 잃은 채 보도의 사명을 다했다고 생색내고, 정부는 방역 성공을 실적으로 포장하여 좋아한다. 우리는 인간을 셀 때는 '명'이란 단위를 쓰고, 동물을 셀 때는 '마리'를 쓴다. 어쩌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작은 차별 속에 무엇이 숨어 있을까. 인간은 개별적 존재로 대우하면서 동물은 집단적 존재로 취급한다. 한 인간의 죽음은 슬픔이요 비극이지만, 수백만 마리의 소 떼죽음은 통계치로 쓴다.
우리 시대 일상의 한복판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부조리의 한 단면을 보고 있다. 생명에 급수를 매기고, 위계를 만들어 존재 가치를 줄 세우고 있다. 그런데 그 기준은 언제나 줄의 맨 앞이나 위계의 최상층에 있다는 인간이 정한다.
권리를 부여하는 자의 오만
"동물의 권리는 인간이 부여한 법률 속에서만 존재한다." 이 선언만큼 인간 중심주의의 오만을 보여주는 것이 있을까. 권리를 누군가가 '부여'하는 것이라면, 이미 권리의 진정성은 소멸하고 만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를 도덕적 존재라고 말하면서, 다른 생명체의 생사여탈을 맘대로 휘두르고 있다. 구제역이 퍼지면 살처분하고, 조류독감이 오면 매몰한다. 모든 것을 '인간의 안전'에 초점을 맞춘다.
정말 다른 선택은 없을까? 격리하고, 치료하고, 기다리는 방법은 없을까? 아니다. 그런 방법들은 '비효율적'이고 '비경제적'이라는 이유로 처음부터 고려를 하지 않았을 뿐이다. 인간 편의를 동물의 생명보다 앞자리에 두고 있다.
하얀 옷 입은 저승사자
구제역 방역에 나설 때는 하얀 방호복을 입는다. 깨끗하고 위생적인 이미지를 보이기 위한 것인데, 이 외관 뒤에서 벌이는 짓은 생명의 대량 학살이다. 이것을 '방역'으로 포장하고, '전문적 조치'라고 정당화한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의 폭력은 더욱 세련되고, 미화된다. 도끼나 칼로 무자비하게 죽인 게 과거였다면, 지금은 마취제와 중장비를 이용하여 은연중에 죽게 만든다. 더 효율적으로, 더 대량으로, 더 깔끔하게. 하지만 생명을 빼앗는 본질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인간은 뭇 생명을 처참하게 살상하고 있다.
하얀 옷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순수나 전문화를 말할까, 아니다. 그것은 책임 회피의 교묘한 수단이다. 하얀 옷을 입으면 개인이 사라지고 집단만 남는다. "나는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름을 숨기는 보호 장치다.
침묵당하는 목소리
"그들은 소리칠 수 없는가?" 시인의 이 물음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소가 정말 소리를 내지를 수 없을까? 아니다. 그들은 끝없이 소리를 지르고 있다. 다만 우리가 듣지 않을 뿐이다. 농장에서 소를 키우던 할머니는 소들의 눈빛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들어오자 모든 동물들이 긴장했다고 한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내가 곧 죽을 것이라는 것을.
어미 소의 죽음은 무엇을 뜻할까? 모성애는 인간이 아닌 생명 있는 존재 모두의 공통점이라는 증거다. 인간만이 사랑할 줄 안다고? 인간만이 슬퍼할 줄 안다고? 어미 소의 죽음은 그런 인간의 오만을 산산조각 낸다.
부조리의 연쇄 고리
구제역 바이러스는 울타리도, 국경도 모른다. 인간이 만든 경계선을 비웃듯 바람을 타고 퍼져나간다. 그런데 우리의 대응은 여전히 경계를 지우는 방법에만 의존한다. 이 농장과 저 농장, 이 지역과 저 지역을 나누어 차단하고 격리한다.
더 큰 부조리는 이 모든 과정을 '인도적'으로 포장한다는 데 있다. 마취제를 놓으니까 고통 없이 죽는다고? 빠르게 처리하니까 고통이 적다고? 이런 논리라면 인간에게도 같은 방식을 적용해야 하지 않을까?
전염병 환자가 생기면 격리 치료를 하면서, 왜 동물에게는 즉시 사형을 집행하는가? 치료제 개발에는 수십억을 투자하면서, 왜 동물 백신 개발에는 인색한가? 결국 경제적 계산의 문제다. 인간의 생명은 '값을 매길 수 없지만', 동물의 생명은 일부러 '손익을 계산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