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날의 추억
1970년대 초 중학생 시절 이야기를 끄집어내게 하는 곳, 성남에 있는 모란시장을 다녀왔다. 아내와 함께 나눈 칼국수 한 그릇, 매운맛 오뎅의 매콤함, 달콤 시원한 식혜와 옛날 커피의 진한 향이 오십 년 전 고향의 4일, 9일마다 서는 5일 장날을 불러왔다. 장터 풍경은 군데군데 묻어있는 추억을 살리고, 너와 나의 마음을 잇게 하는 따뜻한 체험을 가져다 주었다.
매장 곳곳에서 스치는 사람들은 대부분 60대를 넘긴 노인들이었다. 장꾼이든 장 보는 이든, 마주치는 시선 하나, 발걸음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분주함 속에서도 향수를 맡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바람이었다. 같은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무언의 유대가 느껴졌다.
어울림을 막는 벽들
하지만 아쉬운 모습들도 눈에 띄었다. 젊은 손님들이 보이지 않았다. 전통시장이 노인들만의 공간으로 여겨지는 현실이 씁쓸했다. 세대 간의 단절이 이런 곳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게 아쉬운 대목이었다. 더 마음을 무겁게 한 것은 사람들 사이의 무관심이었다. 일행끼리만 대화하고, 옆에 있는 이웃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모습들. 주인과 손님 사이에도 순수한 거래 관계만 존재할 뿐, 인간이 풍기는 정은 찾기 어려웠다. 짬이 날 때도 미소 하나, 날씨 인사 한번 건네지 않는 메마른 풍경이 안타까웠다.
자연스러운 어울림을 위한 걸음들
그렇다면 시간과 공간, 나이와 신분을 뛰어넘는 진정한 어울림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먼저 호기심과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다른 세대, 다른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을 대하는 진실된 관심을 말이다. 젊은이들은 전통시장을 단순히 '불편하고 비위생적인 장소'로 치부하지 말고, 그곳에 담긴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와 지혜를 찾고자 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한편으로 중장년 세대도 젊은이들의 새로운 문화와 가치관을 일방적으로 매도하려 해서는 안 된다.
두 번째로 먼저 다가가는 용기가 필요하다. 시장에서 아쉬웠던 것은 서로 기다리기만 하는 모습이었다. 주인도 손님도, 손님끼리도 서로 첫마디를 꺼내는 걸 망설이는 듯했 다. 내가 먼저 미소를 짓고, 내가 먼저 안부를 물어야 한다. 작은 용기가 큰 변화를 만들 수 있으니.
세 번째는 '공통분모 찾기'다. 나이도 직업도 다르지만, 우리 모두는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누구나 쉬이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는 날씨 이야기, 음식 이야기, 가족 이야기 같은 일상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복잡한 철학이나 어려운 주제가 아니어도 된다. 소박한 일상의 공감대로 어우러지기를 시작할 수 있다.
오일장에서 깨우치는 것
시장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자리가 아니다. 특히 전통 시장은 매매보다 사람과 사람이 먼저 만나는 때이고 자리이다.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교류하는 인생의 교차로다. 칼국수를 함께 먹고, 뜨거운 오뎅 국물을 후후 불어가며 나눠 먹으며, 옛날 커피의 추억을 공유하는 데서 진정한 공동체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시장에서 느낀 아쉬움은 결국 우리 사회 전체의 아쉬운 모습이기도 하다. 5일장은 각자의 울타리 안에 갇혀 지내느라,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잃어가고 있는 현실을 비춰주는 거울이기도 하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그 오래된 장터에서도 여전히 정은 흐르고,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어울리고 소통을 갈망하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조금만 더 용기를 내어 서로에게 먼저 다가가는 일이다.
세상은 넓고, 사람들의 삶은 각양각색이다. 나이도 신분도 다르지만,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동행자이다. 오일장에서 배운 교훈을 일상으로 가져와, 더 따뜻하고 정겨운 공동체를 만들어가면 어떨까. 한 사람의 미소가, 한 마디의 인사가 세상을 조금씩 바꿔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