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 시간을 건너는 대화
한가위 명절이 가까워 오지요. 곧 커다랗고 둥근 보름달이 떠오르겠죠. 고향 마을의 신작로 건너편 어은동 뒷산 꼭대기를 오르면 보일락 말락 한 기차. 그 열차의 기적 소리를 들으며 눈을 반짝이던 일곱 살 아이. 동구밖 다리 위에서 바우람산 너머 어딘가에 있을 서울을 상상하던 그 작은 아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세상 모든 것을 물어대며, 골목과 논밭을 뛰어다니던 그 아이. 지금도 내 마음 한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다.
이젠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 그때 그 아이에게 다가가 말을 건넨다.
"여기서 얼마나 기다렸어?"
"정말 오래 기다렸어요. 할아버지가 저를 기억해 주실 때까지... 정년퇴직하고 손자들과 놀면서야 비로소 저를 찾아주셨네요."
사라져 버린 황금기
그랬구나. 너는 상상력만으로도 매일이 즐거웠던 그 시절을 간직하고 있었지. 앞산에만 올라도 세상이 다 보이던 시절, 바우람산 너머에 서울이 있다고 믿던 그 순수한 지리 감각까지. 세상 모든 것이 호기심이었고, 보고 듣는 모든 것을 물어야 직성이 풀렸던 너의 열정을 나는 언제부터 잊고 살았을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어른이 되면서 점점 궁금한 게 줄어들더라고요. '왜?'라고 묻던 습관도 사라지고, 매일 똑같은 일상에 길들여지면서 저는 자꾸 작아졌어요. 30년 넘게 회사 다니느라, 가족 부양하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할아버지는 저를 찾지 않으셨잖아요."
그래, 맞다. 나는 너를 어디엔가 놔두고 온 채로 어른이 되었다. 밥 먹는 것도 잊고 친구들과 뒹굴며 놀던 그 순간의 몰입을, 이 산 저 들녘 쫓아다니며 놀기에 다른 생각의 겨를이 없던 그 순수함을 어디선가 잃어버리고 살았다.
지금 어떤 마음을 갖고 있어?
"조금 서운하기도 하지만, 이제라도 할아버지가 찾아와 주셨으니 기뻐요. 그리고 궁금해요. 바우람산 너머 서울에서 30여 년을 사셨다니, 그곳은 정말 제가 상상했던 그런 곳이었나요? 기차는 많이 타보셨어요?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호기심이 많으신가요?"
아, 그 맑은 질문들이 가슴을 울린다. 서울은 네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때로는 차가운 곳이었다. 기차도 많이 타봤지만, 어느새 창밖 풍경을 보는 대신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게 되었다. 호기심은... 솔직히 말하면 많이 둔해졌다. 어른들의 현실은 볼품 없어졌어.
"너에게 무슨 말을 해주고 싶어?"
고마워, 먼저. 네가 가진 그 무한한 호기심과 상상력, 그 순수한 몰입의 능력을 60년 동안 잃지 않고 간직해 줘서. 지금 내가 손자들과 함께 웃을 수 있는 것도, 다시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것도 모두 네가 있었기 때문이야.
그리고 미안해. 너를 너무 오래 혼자 기다리게 했구나. 어른이 되면서 '철든다는 것'이 너의 목소리를 외면하는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 같다. 현실에 치여 살면서 네가 가진 그 빛나는 질문들을 '유치한 것'이라고 치부해 버렸던 시간들이 부끄럽다.
내 마음의 문제
그 아이를 오래 기다리게 한 탓에 내 마음은 어떤 문제를 겪고 있었을까? 어느새 일상이 지루해졌다. 새로운 것에 대한 설렘이 줄어들었다. '이미 다 아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세상을 대하는 오만함이 생겼다. 무엇보다 순간에 완전히 몰입하는 능력을 잃었다. 항상 다른 걱정, 다른 생각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앞으로 어떤 '나'가 되고 싶니?
이제 나는 그 일곱 살 아이와 일흔 살 할아버지가 만나는 지점에 서고 싶다. 손자들과 놀 때만이 아니라 일상의 모든 순간에서 그 아이의 호기심을 되찾고 싶다.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에 다시 '왜?'라고 묻고 싶다.
바우람산을 바라보며 서울을 꿈꾸던 그 마음으로, 이제는 더 먼 곳을 꿈꿔보려고 해. 기차를 보며 신기해하던 그 마음으로, 여전히 세상의 모든 것에 놀라워하고 싶어.
어은동 뒷산 꼭대기에서 세상을 바라보던 그 시선으로,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다시 세상을 바라봐야겠어. 그래, 이제부터는 그 아이와 함께 걸어가겠다. 60년의 세월이 주는 지혜와 일곱 살의 순수한 호기심을 함께 품고서. 진정한 어른으로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