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_014] 삶은 여행길이다

객관식 세상에서 주관식 인생을 찾아서

by 여상욱

선택 앞에서 멈칫할 때


삶은 길이다. 내가 선택한 길이 나를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 준다.


살면서 해답 찾기, 정답 찍기를 너무 오래, 너무 많이 해 온 탓일까? '선택'이란 낱말을 만나면 흠칫 할 때가 적지 않다. 나의 눈앞이나 머릿속에서는 생각하면서 선택한 장면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금방 공감하는 장면 몇 가지를 들춰보자. 선거권을 가지면서부터 기표소 안에 들어가 붓대롱으로 찍기할 때의 선택, 연합고사 180문항, 대학 예비고사 300문항 찍기한 때의 선택, 운전 면허 시험 40문항 찍기, 몇 가지 자격 시험. 뭐 이 정도다.


흉내 낸 선택, 객관식의 함정


그런데 이 중에서 선거 때 투표를 빼면 나머지는 우리가 흔히 부르는 객관식 시험이다. 이것은 진정한 선택이라기보다 흉내낸 선택이 아닐까 생각한다. 객관식 시험은 교과서나 다른 교재를 반복하여 학습한 후에 시험 출제자가 의도한 답을 찾는 어떤 게임 같은 것이다. 완전하게 또는 철저하게 익힌 후에 내용을 꿰차고 답을 선택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한편 투표는 후보를 선택하는 일이다. 이것도 번호 순으로 나열된 사람을 찍는다는 점에서 보면 형식적으로 객관식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투표에 앞서 후보에 대하여 내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많이 알아야 한다는 점에서 시험에서의 객관식과는 다르다. 그 기준이 교과서나 어떤 정해진 틀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살아오면서 축적한 사람을 보는 눈, 가치관 같은 게 작용한다. 또한 한쪽으로 치우친 정치적 잣대로 후보를 판단하는 경우 편향적이 될 위험도 있다. 이외도 이런 저런 점에서 투표는 형식은 객관형이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주관식에 많이 가깝다.


인생은 논술형 주관식


범위를 달리 하여 선택을 인생에 대입해보자. 인생은 객관식일까, 주관식일까? 내가 보기로는 100% 주관식이다. 시험 같은 객관식, 투표 같은 객관형 주관식을 넘어 인생은 논술형 주관식이다. 그런데 7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내 눈에 보이는 삶은 객관식에 가까웠다. 가장 큰 원인은 치열한 자본주의 바탕의 경쟁 사회 모드에서 생긴 상호 비교와 헤겔이 말한 인정 투쟁에서 일어나는 타인 의식과 시기, 질투의 과정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삶은 이들을 다 지우고 나를 중심에 두고 자아를 앞장세워 백지에 한 자씩, 한 줄씩 채워가는 주관식이다.


세상이 정한 답을 따라갔던 세월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정답'이 있다고 믿으며 살아왔다. 좋은 학교, 좋은 직장, 좋은 배우자, 좋은 집. 마치 객관식 시험의 선택지처럼 모두가 인정하는 하나의 답이 있을 거라고. 그래서 남들이 가는 길을 따라가고, 남들이 하는 선택을 모방했다. 내 마음의 소리보다는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에 맞추려 애썼다.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여기까지 달려온 것은 아닐까.


나다운 선택, 강변 마을에서 주관식 답안 쓰기


그런데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 아니, 정답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 '나다운 선택'뿐이다. 남들 눈에는 우매하고 뒤떨어진 사람 같아 보일지라도, 세상 기준으로는 비효율적일지라도, 내 스스로 진정 원하는 길이 정답일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주관식 사고가 너무 낯설기만 하다. 너무 긴 시간을 객관식 인생으로 걸어왔기 때문이다.


정년 퇴직, 결국 직장에서 떠밀려 나온 것이다. 내친 김에 도회지를 버리고 강변 마을까지 내려왔다. 도회지에 남아 안정된 노후를 보내는 것이 객관식 답이라면, 시골로 내려와 좋아하는 글 쓰는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주관식 답안을 쓰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불안했다. 과연 옳은 선택일까, 후회하지 않을까.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내 인생에서 가장 '나다운' 선택을 한 것 같았다.


여행에서 찾는 해답의 실마리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주관식 인생을 살 수 있을까? 여행이 그 답의 실마리를 찾아준다고 본다. 여행은 자신을 주관식 인생으로 살게 해주는 좋은 기회다. 언제 떠날지, 어디로 갈지, 누구와 갈지, 무엇을 볼지, 모든 게 내 선택에 달려 있다. 여행 중에는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난다. 계획했던 기차를 놓치기도 하고, 길을 잘못 들기도 하며, 묵고 있는 숙소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있다. 하지만 그 순간들이 진짜 선택의 기회다. 어떻게 대처할지, 어떤 길을 택할지 순간순간 결정해야 한다. 누구도 대신 결정해주지 않는다. 매뉴얼도 지침서도 없다.

여행은 또한 내가 선택한 길을 따라왔는지, 아니면 경쟁 사회에 휩쓸려 끌려왔는지 되돌아보는 시간이다.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곳에 서면, 비로소 내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정말 내가 원했던 삶인지, 아니면 남들의 기대에 부응하려다 놓쳐버린 것들은 없는지 돌이켜보게 된다.


남들이 아닌, 나만의 답안


파리의 작은 카페에서 하루 종일 책을 읽고 있는 노인을 보며, 교토의 절에서 조용히 정원을 바라보는 할머니를 보며, 제주도 올레길에서 만난 혼자 걷는 중년 남자를 보며 생각했다. 저들은 모두 자신만의 주관식 답안을 작성하고 있구나. 남들이 보기에는 별것 아닐 수도 있지만, 자신에게는 가장 소중한 선택들을.


삶은 여행길이다


결국 여행은 삶의 축소판이다. 한정된 시간과 예산 안에서 무수한 선택을 해야 하고, 그 선택들이 모여 하나의 체험을 낳는다. 좋은 여행과 나쁜 여행의 차이는 얼마나 비싼 호텔에 묵었느냐, 얼마나 유명한 곳을 갔느냐에 있지 않다. 얼마나 나다운 선택을 했느냐, 얼마나 진정한 경험을 했느냐에 있다.


이제 깨닫는다. 삶은 길이다. 그 중에서 여행길이다. 목적지도 중요하지만, 그곳에 이르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 빨리 도착하는 것보다 의미 있는 선택을 하며 걷는 것이 더 소중하다. 그리고 그 길에서 만나는 모든 순간들이, 비록 계획과 다를지라도 모두 나만의 이야기가 된다.


삶은 여행길이다. 내가 선택한 길이 비록 구불구불하고 때로는 막다른 길일지라도, 그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만의 여행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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