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그마한 농촌 마을, 양반으로 불리는 한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납니다. 코흘리개 적부터 할아버지ㆍ할머니와 사랑방을 같이 쓰면서 큽니다. 부모님과 윗사람한테 고분고분해서 착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가끔은 싸우기도 했지만 형제들과 우애 있게 지냈습니다. 학교에선 공부 잘하고, 선생님 말씀 잘 듣는 모범생이었고요. 친구들과도 싸우지 않고 잘 사귀었습니다. 청소년기까지는 주어진 틀을 벗어나지 않고, 주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자랐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나에게 붙은 별명은 ‘반듯한 사람’. 청년기 이후로 나를 따라다니며 빛도 되고 그림자도 되었습니다. 집과 학교와 마을의 기대를 받고 그렇게 되려고 힘쓰다 보니 인정도 받고 자존감도 키울 수 있었어요. 하지만 압박감과 정체성 위기감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주변의 기대를 쫓다가 나의 본바탕 무늬는 도대체 찾을 기회도 마음도 없었습니다.
페르소나를 깊게 눌러썼습니다. 나만의 매우 비밀스러운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과 세상에 맞추어 갔습니다. 반듯한 사람이란 기대를 충족시킬 때는 어깨를 으쓱하기도 했지만, 기대를 벗어날 때는 다른 사람에게 주는 실망보다, 나 스스로에게 일어나는 불만이 더 컸습니다. 자아 상실감이 조금씩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육십이 넘은 나이에 돌아다보니, 주변의 기대에 액면 그대로 다가가려는 나에게 완벽주의라는 몹쓸 병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입학하고 며칠 지나지 않았던 때로 기억합니다. 그림 그릴 때 사용하는 도화지 받침대에 이름을 써 오라고 선생님이 숙제를 냈습니다. 한글 한 자씩 익혀가던 때였어요. 어린 마음에 글씨를 보기 좋게 써 가서 선생님께 칭찬을 받으려는 욕심이 일어났던 모양입니다. 대여섯 살 위 외사촌 누나한테 부탁했으나, 내가 바라던 멋진 글씨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실망하여 몇 번이고 더 멋지게 써 달라고 떼를 써면서 누나를 힘들게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남아 선호 사상이 지배하는 사회, 양반 집안의 대를 이을 장손, 선생님에 순종하는 모범생, 마을 어른들 칭찬 듣는 아이.
콩나물시루에서 자라난 밀양댁 큰 손자. 소년은 자신이 갇힌 덫을 제대로 걷어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