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출발시키지 않는 일.

힘들겠죠? 그게 육아더라고요.

by 상처입은 치유자

집안을 훑고 다닌다. 아주 잰걸음으로. 아이 방 옆 화장실 앞을 지날 때였다. '달그락.' 소리가 들린다. 나의 발걸음은 그 자리에 멈춘다.


이제 온갖 상상이 머릿속에서 날아다닌다. '이건... 아이가 뭘 하고 있는 소리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영상들이 넷플릭스 라이브러리보다 더 방대하다. 영화 선택할 때보다 더 빠르게 모든 가능성을 스캔한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든 경험치와 데이터를 긁어모아, 나의 불안을 가장 잘 보여줄 법한 예고편의 영화를 고른다.


이제 이건 현실이다.


그리고 기어이, 입 밖으로 말을 발사시키고 만다. "숙제 안 하고 뭐 하는 거야?!!"


아... 이런. 그 순간 아이의 어이없는 표정 뒤에 승리의 미소가 보이는 듯하다. "숙제하고 있었는데?"


터덜터덜. 허탈하게 문을 닫고 나간다. "미안..."


나의 불안은 언제나 '말'이라는 행위로 현실화된다. 아니, 현실화시킨다. 이건 내가 하는 일이다. 그렇게 많은 패배를 겪었어도 도무지 말을 출발시키지 않는 방법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아이가 나에게 억울하다며 격하게 SOS를 치던 순간에도, 나는 내가 잘못된 영화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외면했다. 그 탓을 외부로 돌리기 바빴다.


'예고편을 잘 만들었어야지.' '사람들이 평점을 5점이나 줬길래 선택했지.' '이렇게 재미없는데 왜 4.5점이나 되는 거야?' '직장 동료가 이거 재밌다던데... 내 스타일이 아닌데?'


으이그... 남 얘기만 듣지 말고 너의 생각도 들으라고! 육아를 글로 배우더니만.. 맞다. 이 경우는 남 얘기만 듣고 판단해 버린 나의 불찰이다. 그래, 우린 우리의 이야기가 또 따로 있지.


왜 나의 불안은 남 얘기를 더 잘 듣는 것인가. 희대의 난제다. 해결책을 찾을 수 없어 침묵으로 피신한다. 그리고 말을 안 하기로 했다.


'무슨 생각으로?!!!'


시험 기간. 아이가 당당하게 넷플릭스를 켠다. 성대가 움찔움찔한다. 볼륨 소리가 내 방까지 들린다. 깔깔대며 웃는다. 움찔움찔하는 성대가 신음 소리를 낸다. 헛기침을 한다. 냉장고를 여는 소리가 들린다. 부스럭. 달그락. 이건 내가 싫어하는 야밤에 불량식품? 이젠 내 다리도 심하게 떨고 있다.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아.. 여기까진 잘 참았다. 10시다. 샤워하고 잘 시간. 10시 28분. 내가 나의 다리와 엉덩이를 붙잡을 수도 없는 순식간에, 거실로 나간다.


"오늘은 영화가 너무 보고 싶었어요."

오호라! 선수 치기? 찔리냐? 본다는 게 고작... [그린치]냐?


아.. 내가 이럴 때 뭐라고 해야 하나 또 데이터를 돌려본다. 후루루루룩!

"어~ 그래."


아이가 바라보는 내 뒤통수가 웃고 있다. '훗! 나 쫌 쿨한데? 노룩(No-look) 대답!! 좋았어!!'

"그리고 지금은 씻고 잘 시간이야."


육아에 유토피아는 없다. 아이는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나무늘보다. 영화 볼 때만 빠르고 TV 끄고 욕실에 들어가는 건 세상 느리다. '끄응.....' 나는 조급함을 들키지 않으려 양치를 세게 한다.


그날 밤, 최대한 쿨한 엄마이고 싶던 나는 먼저 잠을 청해 본다. '나.. 신경 안 써! 쳇!!'


11시 30분이 조금 넘은 시간. 아이가 들어와 나를 안아준다.

"엄마 잘 자요~ 사랑해요."


아이는 그렇게 속삭이고 제 방으로 들어간다. 말을 출발시키지 않은 힘듦을 이렇게 보상해 준다.

세상 참... 공짜란 없다.

이전 10화신호 알아차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