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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서 Feb 13. 2020

목욕탕 세신사

장인

"아이가 아프면 엄마는 골병든다." 진리다. "아이가 아프면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좋겠다." 사실이다.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다. 내가 힘들어서 그렇다. 아이가 아파하는 걸 지켜보는 고통과 그 투정을 받아내야 하는 정신적 고통, 그리고 잠을 설치며 보살펴야 하는 육체적 고통, 그 모든 것이 차라리 내가 아프면 덜 할 것 같다. 지난 10월에 몸소 깨달은 바이다. 아이는 열감기와 구내염을 연이어 치렀고, 결국 내가 골병이 들었다. 심한 감기에 걸린 것이다. 기침 콧물은 문제도 아니었다. 며칠 동안 머리는 깨질 듯 아프고 눈은 빠질 듯 아팠다. 그 와중에도 가장 두려운 건 아이에게 옮기는 것, 그래서 극도로 청결을 유지해야 했고 마침 임신 가능성이 있어서 약은 타이레놀 밖에 먹지 못했다. 게다가 또 마침 아이는 새로운 기관에 적응해야 했기 때문에 함께 등원해야 했다. 너무 힘들었다.

그때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약은 먹을 수 없는 상황이다. 쉴 수도 없다. 그렇다면 잠시 아이를 맡기고 목욕탕을 가보자! 거기서 뜨거운 물에 몸을 지지고 땀을 빼고 나면 좀 가시지 않을까? 스파에 가면 각종 탕마다 감기에 좋다는 문구는 꼭 들어가지 않는가.' 그래서 생전 가지 않는 찜질방을 검색해 보았고, 마침 멀지 않은 곳에 꽤 괜찮은 여성 전용 사우나가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첫 경험을 하게 되었다. 바로 세신을 받은 것이다.

남편을 통해 세신의 신박함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왔다. 안 받아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받아본 사람은 없다는 세신! 나는 안 받아본 사람 영역에 계속 머무를 줄 알았는데, 위기에 닥치니 상황이 달라졌다. 과감히 세신에 도전했고 이왕 받는 김에 그동안의 고생을 보상받고자 아로마 마사지도 추가했다. 두 시간쯤? 아주 강하고 정성스러운 세신사의 손길에 내 몸은 새로 태어났다. 과히 신세계였다! 따끈한 지하에서 나와 물러가는 가을의 찬 바람을 맞으며 돌아갈 때 느낀 상쾌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감기가 달아났다는 사실은 요술에 가까웠다. 요즘 아이에게 읽어주는 동화책처럼 요정이 요술봉을 한번 휘둘렀다 해도 믿겠다. 물론 백 퍼센트 말끔히 사라졌다면 진짜로 마법이겠지만, 독감인가 싶었던 감기가 단 한 번의 세신 후 약간의 기침만 남았으니 그 만 해도 현실감 없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감동스러웠던 것은 세신사님의 장인정신이었다. 굳이 이 정도까지? 싶은 정도의 정성스러움에 돈이 아깝지가 않았다. 그분의 첫인상은, 뭔가 인생 곡절이 많아 보였다. 독함 내지는 억척스러움이 묻어나는 생김새에 마른 몸, 선한 인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처음인 게 티가 났는지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리며 이것저것 챙겨주시는 표정에 경계가 풀어졌다. 세신 초짜인 내게 정말 끝까지 친절해주셨다. 다행히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고, 다 한 것 같은데 또 하고 또 할 때는 조금 아프긴 했지만 불만보다는 그 정성에 감복했다. 다듬이 방망이 만드는 할아버지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다 된 것 같은데 무언가를 또 하고 또 하는... 딱 그런 분이었다. 한 번씩 눈을 떠서 본 얼굴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굉장히 집중하고 계셨다. 바이러스 백신 연구자나 중요한 외교 결정을 내리는 나라님에게 견줄만한 진지한 얼굴이었다. 겨울이 코 앞인 계절, 추울세라 뜨거운 물에 푹 적신 수건을 덮어 따스히 해주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이어진 아로마 마사지도 감동이었다. 마사지라면 적잖이 받아본 편이지만 그동안 이런 마사지는 없었다. 어느 한 부분도 소홀함이 없는 진정한 전신 마사지 었다.

친척 중에 세신사가 한 분 계시다. 지금도 하시는지는 전혀 모른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여유롭지 않으시다는 건 알고 있다. 어쨌든 그때 엄마가 뒷말을 조용히 하시는 걸 들었다. "보험 영업한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때밀이를 하는 것 같다." 유추하면 그분은 세신사라는 직업이 부끄러워서 친척들에게는 보험 영업을 한다고 둘러댔던 것이다. 세신사라는 직업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어렸던 그 시절 그렇게 짐직하게 되었다. 그 후로도 내 인식 속 세신사는 건강한 신체 외에 가진 것이 없는 이가 벼랑 끝에서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직접 경험한 세신사는.. 위대한 분이다. 최소한 내가 만난 분은 그러했다. 누구보다도 소명감 투철한 전문가다.

물론 그분의 사연 많아 보이는 얼굴은 카운터에 앉은 사모님의 화려한 외모와 매니저쯤으로 보이는 분의 두둑한 인상과는 대조되었다. 염색과 파마는 흔적만 남아있고, 화장은 다 지워져서 아이라인 문신만 두드러지고,  뼈 마디는 불거지고, 나이만큼의 주름은 있지만 웃는데 쓰이는 주름은 별로 보이지 않는... 관상을 볼 줄 몰라도 그녀가 부모복이나 남편복같이 주어지는 행운은 얼마 누리지 못했다는 건 짐작이 되었다. 그래도 할 수 있다면 그분에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은 정말 멋진 분이라고, 자부심을 가지실만 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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