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을 경험한다는 것: 감각이 생각으로 바뀌는 순간에 관하여 #3
실패의 의미
지금까지 우리는 예술 경험이 성공했을 때를 이야기했습니다. 감동받고, 변화하고, 의미를 발견하는 순간들을. 하지만 예술 경험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순간.
누구나 경험합니다. 모두가 감탄하는 명작 앞에서 “이게 뭐가 좋다는 거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친구들은 눈물을 흘리는데 나는 아무 감정도 들지 않을 때. 비평가들이 극찬하는 전시를 보고 나왔는데 텅 빈 느낌만 남을 때.
이 순간의 감정은 복잡합니다. 당혹감, 소외감, 때로는 분노. “내가 뭔가 놓친 건가?” “내가 예술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건가?” 혹은 반대로 “이건 사기야. 황제의 새 옷이야.”
하지만 이 실패한 만남도 예술 경험의 중요한 일부입니다.
세 가지 가능성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을 때, 세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첫째, 작품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모든 작품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평론가의 찬사, 시장의 인정, 제도의 승인이 언제나 질을 보증하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황제가 정말 옷을 입지 않았습니다.
둘째, 나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거나, 필요한 맥락을 모르거나, 그날 컨디션이 좋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같은 음악이 어느 날은 아무렇지 않다가 다른 날은 가슴을 울립니다. 우리는 변합니다.
셋째, 타이밍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어떤 작품은 10년 후에 다시 봐야 합니다. 어떤 경험은 특정한 삶의 순간에만 의미를 갖습니다. 청소년기에 무의미하게 보였던 소설이 중년에는 심장을 찌릅니다.
중요한 것은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판단 유보의 기술
“이 작품은 형편없어” 혹은 “나는 예술을 모르는 둔한 사람이야” 둘 다 너무 빠른 결론입니다. 더 성숙한 태도가 있습니다.
“지금 나는 이 작품과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패배가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개방성입니다. 작품에 대해서도, 나 자신에 대해서도 열려 있는 태도입니다.
실제로 예술사에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들은 처음에 거부당했습니다. 인상파 화가들은 조롱받았고,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초연은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베토벤의 후기 현악 사중주는 동시대인들에게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진정한 혁신은 즉각적으로 소비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감각을 요구하고, 새로운 문법을 배울 것을 요청합니다. 처음에는 낯설고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은 때로 “아직 느낄 준비가 되지 않았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실패를 대하는 자세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기록하십시오. “2025년 10월, 나는 이 작품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5년 후 다시 봤을 때 어떻게 느끼는지 비교할 수 있습니다.
둘째, 호기심을 유지하십시오. 왜 다른 사람들은 좋아할까? 무엇을 보는 걸까? 그들의 관점을 이해하려는 것이 당신의 경험을 풍부하게 만듭니다.
셋째, 돌아올 기회를 남겨두십시오. “이것은 나를 위한 작품이 아니다”가 아니라 “이것은 지금의 나를 위한 작품이 아니다”라고 말하십시오. 문을 완전히 닫지 마십시오.
어쩌면 가장 깊은 예술 경험은 실패한 만남에서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쉽게 감동하고 쉽게 잊어버리는 작품보다, 처음에는 거부했지만 계속 마음에 걸리는 작품이 더 오래 우리와 함께합니다.
실패는 끝이 아니라 시작일 수 있습니다. 이해하지 못한 것, 거부한 것, 불편했던 것이 우리를 가장 많이 변화시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