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시대의 창조적 행위 #1

AI 시대, 창조란 무엇인가 - 선택의 존재론

by 류임상

무한한 가능성 앞에 선 창작자


알고리즘이 10초 만에 작곡한 음악을 듣고 눈물을 흘린다면, 그 감동의 원천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기계가 배열한 음파일까요, 아니면 그 배열을 무수한 선택지 중에서 골라낸 인간의 판단일까요.

우리는 창작의 존재론적 기반이 흔들리는 시대를 통과하고 있습니다. 기계가 이미지를 생성하고 음악을 구성하며 텍스트를 직조합니다. 이 변화는 단순한 기술적 진보가 아닙니다. 이것은 '만든다'는 행위 자체에 대한 근본적 재정의를 요구합니다.


진짜 질문은 이것입니다. 창조란 무언가를 물리적으로 생산하는 행위일까요, 아니면 이미 존재하는 것들 사이에서 의미의 관계망을 구축하는 행위일까요.


본질적으로 AI 시대의 인간 창작자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본질적 형태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 본질은 생성이 아닌 선택에, 제작이 아닌 배열에, 발명이 아닌 발견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역할은 우리가 미술관에서 만나는 큐레이터의 작업과 심층적 구조를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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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터는 무엇을 창조하는가

관계의 건축학


큐레이터는 새로운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작품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대화를 설계합니다. 각 작품은 그 자체로 완결되어 있지만, 큐레이터가 구축한 맥락 속에서 전혀 새로운 의미론적 위치를 점유하게 됩니다.


전시장의 첫 번째 방에 놓인 풍경화는 단지 풍경을 재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관람객의 시선을 특정한 방향으로 이끄는 시작점입니다. 두 번째 방의 초상화는 첫 번째 방의 고독과 대조를 이루며, 개인과 공간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세 번째 방에 이르면, 관람객은 더 이상 개별 작품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전시 전체가 제기하는 존재론적 질문과 마주합니다.


이것이 큐레이션의 본질입니다. 물감이나 캔버스가 아닌, **의미의 통사론**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언어가 단어들의 배열을 통해 의미를 만들어내듯, 큐레이터는 작품들의 배열을 통해 새로운 서사를 구성합니다.


맥락의 생성력


작품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변 요소와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됩니다. 같은 그림이라도 어떤 작품 다음에 배치되는가, 어떤 조명 아래 놓이는가, 관람객이 어떤 경로를 통해 그것에 도달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발화를 수행합니다.


큐레이터는 이 맥락의 생성력을 활용합니다. 작품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작품이 전시 서사의 어느 지점에 위치하는가**입니다. 19세기 풍경화를 단독으로 보면 평화로운 자연의 재현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산업화 시대의 도시 풍경 다음에 배치하면, 상실된 자연에 대한 향수로 읽힙니다. 현대의 환경 파괴 이미지 앞에 놓으면, 예언적 경고가 됩니다.


큐레이션은 작품에 외부적 서사를 부과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작품이 이미 내포하고 있던 잠재적 의미들 중 특정한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작업입니다. 모든 작품은 복수의 의미를 품고 있으며, 큐레이터는 그중 하나를 선택적으로 활성화시킵니다.


해석학에서 말하는 '지평 융합'이 여기서 일어납니다. 작품의 역사적 지평—그것이 창조된 시대의 사회적, 문화적 맥락—과 현재 관람객의 경험적 지평이 큐레이터의 매개를 통해 만납니다. 이 만남에서 새로운 이해가 탄생합니다. 과거의 작품이 현재의 질문에 응답하고, 현재의 관람객이 과거의 통찰을 재발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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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의 구조


전시는 보여주는 것만큼이나 보여주지 않는 것으로 구성됩니다. 큐레이터의 선택은 필연적으로 배제를 동반합니다. 전시장에 걸리지 못한 수천 점의 작품들은 물리적으로 부재하지만, 그 부재가 오히려 현존하는 작품들의 의미를 규정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누락이 아닙니다. 부재는 적극적인 의미론적 기능을 수행합니다. 관람객은 눈앞의 작품만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선택되었다는 사실—즉, 다른 무수한 가능성들이 배제되었다는 사실—을 함께 경험합니다.


'여성 예술가'만을 다루는 전시를 생각해봅시다. 이 전시의 의미는 선택된 작품들만으로 구성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배제되어온 여성 작가들의 부재, 주류 미술사에서 침묵당했던 목소리들의 부재를 배경으로 합니다. 현재의 현존은 과거의 부재를 증언합니다.


큐레이터가 구축하는 것은 현존의 공간만이 아니라 **부재의 지형도**입니다. 어떤 작가가 의도적으로 제외되었는가, 어떤 시대가 재현되지 않았는가, 어떤 관점이 침묵되었는가—이러한 공백들이 전시의 윤곽을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존재론적으로 볼 때, 선택은 항상 이중적 행위입니다. 무언가를 긍정하는 동시에 다른 모든 것을 부정합니다. 큐레이터는 이 존재와 무의 변증법을 다루는 사람입니다. 그들의 작업은 가시성의 정치학입니다—무엇을 보이게 하고 무엇을 보이지 않게 할 것인가에 대한 권력의 행사.


경험의 시간성


전시는 공간 예술이지만 동시에 시간 예술입니다. 관람객이 전시장을 통과하는 시간은 단순한 물리적 이동이 아니라, 큐레이터가 설계한 의미의 전개 과정입니다.


첫 번째 작품을 본 후의 관람객과 마지막 작품을 본 후의 관람객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전시를 경험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지각 구조가 재편됩니다. 작품 A를 보고 나서 작품 B를 보는 것과, 작품 B를 먼저 보고 작품 A를 보는 것은 전혀 다른 경험입니다. 순서가 의미를 만듭니다.


큐레이터는 이 시간적 전개를 섬세하게 조율합니다. 긴장을 점진적으로 고조시킬 것인가, 아니면 극적인 전환을 통해 관람객을 놀라게 할 것인가. 유사한 작품들을 연속적으로 배치하여 주제를 강화할 것인가, 대조되는 작품들을 병치하여 인지적 충격을 줄 것인가.


이것이 큐레이션의 궁극적 성취입니다—공간적 배치를 통해 관람객의 내적 시간을 조율하는 것. 큐레이터는 관람객이 전시장에서 보내는 시간을 일상적 시간과 구별되는 '다른 시간'으로 변형시킵니다. 이 시간 안에서 관람객은 단순한 감상자가 아니라 의미 생성의 능동적 참여자가 됩니다.


전시를 나서는 관람객은 들어올 때와 다른 사람입니다. 그들의 내면에 새로운 질문이 각인되었고, 세계를 보는 시각이 조금 변화했으며, 이전에는 인식하지 못했던 연결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이 큐레이션의 변형적 힘입니다.


선택의 본질을 향하여


큐레이터의 작업을 탐구하며 우리는 한 가지 통찰에 도달합니다. 창조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신비로운 과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들 사이에서 새로운 관계를 발견하고 구축하는 행위입니다.


이 통찰은 AI 시대 창작의 본질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다음 회에서 우리는 AI 음악 제작의 세계로 들어가, 알고리즘이 생성한 무한한 가능성 앞에서 인간 창작자가 수행하는 선택의 행위를 탐구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이 큐레이터의 작업과 어떻게 심층적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선택한다는 것은 단순한 결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존재론적 행위입니다. 잠재성을 현실성으로 변환시키고, 침묵을 발화로 만들며, 가능성을 작품으로 구체화하는 창조의 본질적 형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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