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예술은 ‘오해’에서 태어난다

정확성에 집착하는 AI, 엉뚱하게 오독하는 인간, 그리고 그 사이의

by 류임상

챗GPT나 미드저니 같은 생성형 AI를 다루다 보면, 이들이 지독한 ‘모범생’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프롬프트를 입력하면 AI는 내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합니다. “사과를 그려줘”라고 하면 세상에서 가장 사과다운 사과를 그려내고, 질문을 던지면 통계적으로 가장 정답에 가까운 답변을 내놓습니다.


유능합니다. 빠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확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완벽한 ‘정확성’ 앞에서 저는 종종 숨이 막히는 기분을 느낍니다.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술에서 기대하는 것은 교과서적인 정답이 아니라, 예상을 기분 좋게 배반하는 ‘파격’이 아닐까요?


#1. 환각(Hallucination)은 버그가 아닙니다


AI 개발자들은 인공지능이 사실이 아닌 것을 마치 사실인 양 그럴듯하게 만들어내는 ‘할루시네이션(환각)’ 현상을 치명적인 오류로 규정합니다. 그래서 RAG(검색 증강 생성) 같은 기술을 도입해 어떻게든 이 ‘거짓말’을 막으려 애씁니다. “사실(Fact)과 다르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하지만 예술의 영역에서 이 ‘환각’은 오류가 아니라 축복받은 재능입니다. 세르반테스의 소설 속 ‘돈키호테’를 생각해 봅시다. 그는 눈앞에 돌아가는 풍차를 보고 사악한 거인이라 착각하여 창을 겨눕니다. AI의 시각 시스템으로 보자면 심각한 인식 오류입니다. 만약 AI였다면 “저것은 풍력 에너지를 생산하는 풍차입니다. 공격 대상이 아닙니다”라고 정확하게 팩트를 체크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돈키호테의 그 엉뚱하고 터무니없는 ’오독(Misreading)’이 있었기에, 그는 단순한 미치광이가 아니라 문학사에서 가장 사랑받는 불멸의 기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Fact)을 보는 것은 카메라나 센서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 위에 자신만의 환상을 덧입히는 것은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창조적 왜곡’입니다. AI는 팩트를 말하지만, 예술가는 팩트 너머의 진실을 말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2. 입력과 출력이 다를 때, 예술이 됩니다


입력값(Input)과 출력값(Output)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나오는 기계를 우리는 ‘창작자’가 아니라 ‘복사기’라고 부릅니다. 창작자는 세상이라는 텍스트를 받아들여, 자신만의 필터로 오해하고, 굴절시키고, 비틀어서 내놓는 존재입니다.


역사를 바꾼 발견들도 종종 위대한 오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콜럼버스는 인도를 찾겠다는 목표를 가졌지만, 계산 착오와 오해 끝에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습니다. 그의 항해는 원래 목적에 비추어보면 명백한 ‘실패’이자 거대한 ‘오류’였지만, 그 오해가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문을 열었습니다.


예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의도했던 대로 정확하게 그려지는 그림은 기술 도면일 뿐입니다. 붓이 미끄러지고, 의도와 다르게 색이 섞이고, 문장이 옆길로 새는 순간, 우리는 계획하지 않았던 낯선 아름다움을 마주하게 됩니다. AI는 샛길로 빠지지 않도록(정확성을 위해) 설계되어 있지만, 인간은 기꺼이 길을 잃도록(새로움을 위해) 태어난 존재 같습니다.


#3. AI는 정말 오해할 수 없을까?


그런데 흥미로운 반전이 있습니다. 최근의 AI는 ’통제된 무작위성(controlled randomness)’을 학습하기 시작했습니다. 개발자들은 Temperature라는 파라미터를 조정해 AI의 출력에 의도적인 변동성을 부여합니다. 숫자를 높이면 AI는 더 예측 불가능하고, 때로는 엉뚱한 답변을 내놓습니다. 마치 ‘계산된 즉흥성’처럼 말이죠.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AI가 드디어 창조적 오해의 영역에 발을 들인 것일까요, 아니면 단지 오해를 정교하게 시뮬레이션하는 것에 불과할까요?


여기에 핵심적인 질문이 숨어 있습니다. 돈키호테가 풍차를 거인으로 ‘진심으로 착각했기에’ 그의 오해가 위대한 것일까요, 아니면 세르반테스가 그 오해를 ‘의도적으로 창작했기에’ 위대한 것일까요? 만약 후자라면, AI의 ‘설계된 오류’와 인간 작가의 ‘의도된 왜곡’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을까요?


어쩌면 중요한 것은 오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가 아니라, 그 오해가 우리에게 새로운 의미를 선사하는지 여부일지도 모릅니다. AI가 생성한 예상 밖의 이미지 앞에서 우리가 전율한다면, 그 전율의 진정성까지 의심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4. 정답이 없는 대화


AI가 생성한 이미지는 명쾌합니다. 무엇을 그렸는지, 어떤 스타일인지 설명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미술관에서 한참을 서성이게 만드는 작품들은 대체로 불친절합니다.


“작가는 왜 이렇게 그렸을까?”, “이건 슬픔일까, 분노일까?”


관객은 작가의 의도를 끊임없이 ‘오해’합니다. 그리고 그 오해의 과정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좋은 예술은 정답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마음껏 오독할 수 있도록 여백을 남겨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AI가 만든 작품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우리가 AI의 출력물을 보며 자신만의 해석을 덧입히는 순간, 그것은 이미 우리만의 예술이 됩니다. 창작의 주체가 누구인지보다, 의미가 탄생하는 그 찰나가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5. 당신만의 오답을 적어내세요


그러니 AI 시대에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정확성’만이 아닙니다. 세상의 정보를 빠짐없이 수집하고 분석하는 일은 AI에게 맡겨두십시오.


대신 우리는 엉뚱하게 상상하고, 제멋대로 해석하고, 과감하게 틀려야 합니다. AI는 “사과는 과일이다”라는 정답을 말할 때, 우리는 “내 마음은 사과처럼 붉게 멍들었다”라는 비논리적인 오답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AI와의 협업 가능성도 열어두어야 합니다. AI의 ‘통제된 무작위성’과 인간의 ‘자유로운 오해’가 만날 때, 어쩌면 우리는 지금껏 상상하지 못한 새로운 형태의 예술을 목격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오해했느냐가 아니라, 그 오해가 세상에 어떤 새로운 의미를 던져주느냐일 것입니다.


정확하게 이해하는 능력과 창의적으로 오해하는 능력, 그 둘 사이의 긴장과 조화. 그것이 알고리즘과 공존하는 시대를 살아갈 우리의 과제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오늘, 무엇을 오해할 준비가 되셨나요? 그리고 혹시, AI와 함께 오해할 준비도 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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