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독해'하지 말고 '경험'하세요

텍스트 너머의 예술을 만나는 법

by 류임상

"이중섭은 죽었다"

오래전, 제가 기획했던 전시의 제목입니다. 다소 도발적인 이 문장은 국민 화가 이중섭 님을 폄하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교과서 속에 박제된 위인, 줄줄 외워야 하는 지식으로서의 미술은 이제 그만 보내주자는 뜻이었습니다.


우리는 학교 미술 시간에 예술을 '학습'하고 '독해'하라고 배웠습니다. "작가의 의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정답을 맞혀야 했으니까요. 이 습관은 성인이 되어서도 유효합니다. 큰맘 먹고 미술관에 가면, 우리는 그림보다 하얀 벽에 붙은 캡션을 먼저 읽습니다. 깨알 같은 글씨를 읽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이며 그림을 바라봅니다.

"아, 이게 고독을 표현한 거구나."


그런데 정말 고독이 느껴지셨나요? 아니면 고독이라고 '써 있어서' 그렇게 믿으신 건가요? 미술관을 나설 때 가슴보다 다리가 더 아픈 이유, 우리가 그곳에서 '공부'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3초의 직관,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음악을 들을 때를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노래를 듣자마자 3초 안에 판단합니다. '이 노래 좋다', 혹은 '별로네'. 화성학적으로 코드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분석하며 듣는 사람은 전문가 외에는 없습니다.


미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각 예술은 언어보다 빠릅니다. 작품 앞에 섰을 때 3초 안에 느껴지는 '좋음'과 '싫음', 혹은 '모르겠음'. 그 직관적인 느낌이야말로 가장 정확한 감상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주관적 취향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경미학(Neuroaesthetics)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예술 작품을 마주한 순간 언어적 사고가 개입하기 전에 이미 정서적 반응을 일으킵니다. 런던 대학의 세미르 제키(Semir Zeki) 교수는 우리가 아름다운 이미지를 볼 때 뇌의 내측 안와전두피질(medial orbito-frontal cortex)이 활성화된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이 영역은 보상과 쾌감을 담당하는 곳으로, 우리가 예술 앞에서 느끼는 '좋음'의 감각이 본능적이고 생물학적인 반응임을 시사합니다.


전직 큐레이터로서 고백하건대, 텍스트는 잠시 잊으셔도 좋습니다. 대신 그 공간의 공기를 마셔보세요. 높은 천장의 울림, 조명의 온도, 그림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 심지어 창밖의 풍경까지.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총체적 감흥(Total Immersion)'이 텍스트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는 이를 '체현된 인지(Embodied Cognition)'라는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세계를 지각한다는 것입니다. 미술관의 차가운 대리석 바닥, 고요한 정적, 캔버스에서 느껴지는 물감의 질감까지—이 모든 신체적 경험이 작품의 의미를 구성합니다. 예술은 망막에 맺히는 이미지가 아니라, 몸 전체로 받아들이는 현존(presence)의 경험인 것입니다.


설명은 나중에 읽어도 됩니다. 아니, 영영 안 읽어도 상관없습니다. 당신의 마음에 어떤 파동이 일었다면, 작가의 의도와 달라도 그것은 이미 당신에게 훌륭한 예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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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증샷을 찍는 당신, 속물일까요?


미술관에서 찰칵찰칵 셔터 소리가 들리면 눈살을 찌푸리는 분들도 계십니다. 엄숙한 예술을 가볍게 소비한다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과거에는 귀족들이 그림을 직접 사서 거실에 걸어두며 예술을 소유했습니다. 대중음악이 등장했을 때 우리는 LP와 CD를 사 모으며 음악을 소유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는 어떻게 예술을 소유할까요? 바로 '이미지'입니다.


스마트폰을 들어 마음에 드는 작품을 찍고, 그 앞에서 내 모습을 남기고, SNS에 공유하는 행위. 이것은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컬렉팅(Collecting)입니다. "나 이 작품 앞에서 이런 감정을 느꼈어"라고 기록하고, 그 경험을 소유하고 싶은 현대적 욕망의 발현입니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1936년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복제 기술이 예술의 '아우라(Aura)'를 파괴한다고 우려했습니다. 원본만이 가지는 유일무이한 현존감, 그 신비로운 권위가 사라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관객들은 사진을 찍는 행위를 통해 자신만의 아우라를 창조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사진: 중간 예술」에서 사진 찍기가 단순한 기록 행위가 아니라 '무엇을 찍을 가치가 있는가'를 선택하는 문화적 실천이라고 분석했습니다. 미술관에서 특정 작품 앞에 멈춰 서서 프레임을 구성하는 순간, 관객은 수동적 감상자에서 능동적 큐레이터로 전환됩니다. 당신의 시선이 곧 미학적 판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끄러워 말고 찍으세요. 당신이 카메라 렌즈를 통해 잘라낸(Cropping) 그 사각의 프레임, 그것이 바로 당신이 큐레이팅한 당신만의 작품입니다.


#3. 원본보다 중요한 것은 '나의 경험'입니다


몇 년 전, 명화들을 거대한 스크린에 띄운 '미디어 아트' 전시들이 유행했습니다. 미술계 일각에서는 비판했습니다. "원본(Original)도 없는 가짜 전시"라고요. 하지만 대중은 열광했습니다. 왜일까요?


사람들은 액자 속의 고흐보다, 내 발밑에서 별이 흐르고 귓가에 음악이 들리는 그 '환영(Illusion)'의 공간을 걷고 싶었던 것입니다. 관객들은 더 이상 수동적인 감상자가 되기를 거부합니다. 작품 속으로 뛰어들어 온몸으로 느끼는 '경험(Experience)'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미학의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반영합니다. 전통적인 예술 이론은 칸트(Immanuel Kant)의 '무관심적 관조(Disinterested Contemplation)'에 기반해 왔습니다. 관객은 작품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순수하게 형식미를 감상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관객은 이 거리를 해체합니다. 작품 안으로 들어가 그 일부가 되기를, 예술과 삶의 경계가 허물어지기를 원합니다.


미국의 철학자 존 듀이(John Dewey)는 「경험으로서의 예술(Art as Experience)」에서 이를 예견했습니다. 그는 예술이 박물관에 격리된 특별한 대상이 아니라, 일상적 경험의 연장선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진정한 미적 경험은 작품과 감상자 사이의 역동적인 상호작용 속에서 발생하며, 그 경험의 주체는 언제나 '지금, 여기의 나'라는 것입니다.


미술관은 위대한 명작을 모셔둔 신전이 아닙니다. 작품을 매개로 나의 감각을 깨우는 놀이터여야 합니다. 주인공은 벽에 걸린 그림이 아니라, 그 앞에 서 있는 '당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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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해석의 권위는 누구에게 있을까요?


오랫동안 예술의 '올바른' 해석은 전문가의 영역이었습니다. 미술사가, 비평가, 큐레이터가 작품의 의미를 규정하고, 대중은 그 해석을 학습하는 구조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권위의 위계는 점차 해체되고 있습니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1967년 「저자의 죽음(The Death of the Author)」에서 혁명적인 선언을 했습니다. 텍스트의 의미는 저자의 의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해석 속에서 탄생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시각 예술에 적용하면, 작품의 의미는 작가가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창조하는 것이 됩니다.


수용미학(Reception Aesthetics)의 창시자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Hans Robert Jauss)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그는 예술 작품이 고정된 의미를 가진 완결된 객체가 아니라, 각 시대의 관객들에 의해 끊임없이 재해석되는 열린 구조라고 보았습니다. 오늘 당신이 모네의 수련 앞에서 느낀 평화로움은 19세기 파리 살롱의 관객이 느꼈던 것과 다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차이는 오류가 아니라, 예술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당신의 해석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삶, 당신의 기억, 당신의 상처와 기쁨이 투영된 고유한 읽기입니다. 그 누구도 그것을 부정할 권리가 없습니다.


#5. 이번 주말엔 '공부'하지 마세요


예술은 더 이상 난해한 암호 해독이 아닙니다. 미술관 문을 나설 때, 머릿속에 지식이 남는 대신 가슴속에 어떤 '기분'이 남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수전 손택(Susan Sontag)은 「해석에 반대한다(Against Interpretation)」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해석은 세계를 빈곤하게 만든다. 세계를 그림자의 세계, 즉 '의미'의 세계로 대체하기 위해서." 그녀는 예술의 내용(content)에 집착하는 대신 형식(form)의 에로틱한 표면에 주목할 것을 권했습니다. 분석하지 말고 느끼라는 것, 의미를 찾지 말고 현존에 머물라는 것입니다.


이번 주말, 미술관에 갈 계획이 있다면 '공부'하려는 마음은 집에 두고 가시길 바랍니다. 대신 가벼운 마음과 편한 신발, 그리고 당신의 직관만 챙기세요.


안목은 학습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경험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것이니까요. 예술은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며, 미술관은 시험장이 아니라 당신의 감각이 자유롭게 숨 쉬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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