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AI는 노이즈를 탐하는가

#완벽을 거부하는 알고리즘

by 류임상

최근 미드저니(Midjourney)나 소라(Sora)가 보여주는 결과물을 보고 있으면 가끔 숨이 턱 막힙니다. 모공 하나, 빛의 산란 한 점까지 수학적으로 계산된 그 ‘완벽한 선명함’ 때문입니다. 인류가 수십 년간 염원해 온 8K의 해상도가 드디어 우리 손바닥 안에서 구현된 셈입니다.


그런데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토록 완벽한 이미지를 손에 쥔 창작자들이 프롬프트 창에 가장 먼저 써넣는 단어는 아이러니하게도 ‘#Film_Grain(필름 입자)’, ‘#Dust(먼지)’, ‘#Light_Leak(빛샘 현상)’ 같은 것들입니다. 0.1초 만에 생성된 고화질 이미지 위에, 우리는 일부러 디지털의 매끄러움을 훼손하는 ‘노이즈’를 덧칠합니다. 우리는 왜 기술의 정점에서 기술의 결함을 그리워하는 걸까요?


#1 ‘매끄러운 진공’에서 도망치는 법


디지털은 매끄럽습니다. 0과 1 사이에는 어떠한 마찰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물리적 세계는 결코 매끄럽지 않습니다. 렌즈에 묻은 지문, 인화지 위로 떨어진 먼지, 오래된 필름의 거친 입자들은 사실 ‘방해 요소’가 아니라 그 순간이 ‘물리적 실체’를 가졌음을 증명하는 흔적들이었습니다.


AI가 만든 매끈한 이미지가 어딘지 모르게 섬뜩(Uncanny)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곳에 ‘시간의 마찰’이 부재하기 때문입니다. 카메라가 실제로 그곳에 있었던 적이 없고, 빛이 렌즈를 통과한 적도 없습니다. 그 이미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먼지 하나 없는 진공 상태의 방에서 느껴지는 결벽증적인 공포와 비슷합니다.


우리는 그 차가운 완벽함에 적응하지 못한 채, 본능적으로 기계의 결과물 위에 인간적 ‘오류’를 이식하기 시작했습니다. 노이즈는 이미지를 ‘지저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각적 정보 사이에 숨 쉴 수 있는 ‘틈’을 만들어 인간의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를 열어줍니다.



#2 기호가 된 우연, 학습된 진정성


디지털 향수(Digital Nostalgia)라고 명명된 이 현상은 단순한 레트로 취향이 아닙니다. 그것은 ‘실존의 증명’에 가깝습니다. 예전에 미술관 수장고에서 만났던 오래된 박수근의 작품 캔버스의 마티에르(Matière)처럼, 필름 그레인은 빛이 은염 입자와 부딪히며 만들어낸 투쟁의 기록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역설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AI가 정교하게 흉내 낸 ‘거친 질감’이 우리를 위로할 수 있다면, 우리가 사랑했던 것은 ‘과거의 기억’ 자체였을까요, 아니면 잘 정제된 ‘과거의 스타일’이었을까요?”


답은 아마도 둘 다일 것입니다. 필름 그레인이나 빛샘 효과는 이미 수십 년간 “진정성의 기호”로 문화적으로 학습되어 왔습니다. 우리는 그 질감을 보며 “이것은 진짜 순간을 담았다”고 해석하도록 훈련받았습니다. AI가 복제한 노이즈가 진짜 아날로그의 우연성은 아니지만, 그것이 우리를 감정적으로 특정한 장소로 데려간다면 그 효과는 실재합니다.


알고리즘은 이제 우리의 향수마저 학습하여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추억의 질감’을 배달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스타일이 된 기억이라 해도 여전히 우리에게 의미 있는 앵커 역할을 한다는 점입니다. AI는 비를 맞지 않기에 렌즈에 맺힌 빗방울의 차가움을 모릅니다. 단지 그 빗방울이 굴절시키는 빛의 물리적 값만을 계산할 뿐입니다.


#3 다시, 인간의 눈으로


예술의 본질은 기술적 해상도가 아니라 ‘정서적 해상도’에 있습니다. 기술이 어떤 질감도 완벽히 재현할 수 있게 되면, 창작자의 역할은 *어떤* 질감을 선택하고 *왜* 그것이 이 순간에 필요한지를 아는 것으로 이동합니다.


AI가 노이즈를 복제하는 시대에,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는 그 인공적인 입자들 사이에 어떤 ‘진실된 순간’을 담아낼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AI는 우리가 요청한 빗방울의 굴절률을 계산할 수 있지만, 왜 이 장면에 비가 필요한지는—그 떨림은—여전히 인간의 몫입니다.


결국 관객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것은 8K의 선명함이 아니라, 그 거친 입자 너머로 전해지는 창작자의 떨리는 시선입니다. 우리가 AI 이미지에 노이즈를 더하는 행위는, 어쩌면 기계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의미의 선택’이라는 영역을 지키려는 인간 창작자의 마지막 저항이자, 동시에 가장 본질적인 역할의 재발견일지도 모릅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