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전체를 예술로 만드는 법
* '미술관을 버리고 놀이터로 가라'는 #1, #2 로 나누어 연재됩니다.
“다음 주 금요일 저녁 7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만나요.”
친구의 제안에 당신은 잠시 망설입니다. 금요일 저녁을 미술관에서? 솔직히 말하면, 조금 부담스럽습니다. 딱딱한 전시 공간, 작은 글씨의 캡션, 아픈 다리, 그리고 뭔가 ‘교양 있어 보여야’ 한다는 은근한 압박.
대신 이렇게 제안하면 어떨까요?
“다음 주 금요일 저녁 7시, 성수동 카페거리에서 만나요.”
당신의 표정이 밝아집니다. 편안한 조명, 좋은 음악, 맛있는 커피, 그리고 인스타그램에 올릴 만한 분위기.
두 장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하나는 ‘예술을 감상하는 곳’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을 경험하는 곳’입니다.
20년간 미술관에서 일했던 제가 이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술은 미술관 밖에 더 많이 있습니다.
#1 왜 우리는 미술관을 ‘공부하는 곳’으로 만들었을까
18세기, 유럽의 귀족들은 자신의 컬렉션을 일반 대중에게 공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루브르, 대영박물관, 우피치 같은 위대한 미술관들이 탄생했죠.
하지만 그 탄생의 순간부터, 미술관은 ‘신전(Temple)’의 형태를 띠었습니다. 높은 천장, 대리석 바닥, 엄숙한 정적. 마치 교회나 성당처럼, 미술관은 ‘특별한 곳’이 되었습니다. 일상과 분리된, 경건함을 요구하는 공간으로요.
미술사학자 캐롤 던컨(Carol Duncan)은 『미술관이라는 환상(Civilizing Rituals)』에서 이를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미술관은 중립적인 공간이 아니라, 특정한 계급과 문화의 권위를 재생산하는 ‘의례의 공간(Ritual Space)’이라는 것입니다.
작은 목소리로 말해야 하고, 천천히 걸어야 하고, 작품에 손대면 안 되고, 뭔가를 ‘배워야’ 하는 곳. 이것이 우리가 미술관에서 무의식적으로 따르는 규칙들입니다.
그런데 잠깐, 예술이 원래 이런 건가요?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의 광장에서는 사람들이 떠들며 조각상을 구경했습니다.
인상파 화가들은 카페에서 그림을 그렸고, 사람들은 와인을 마시며 그 그림을 봤습니다.
재즈는 시끄러운 클럽에서, 락은 땀 흘리는 라이브 홀에서 탄생했습니다.
예술은 원래 삶과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분리시켰을 뿐입니다.
#2 성수동 카페는 왜 ‘힙’할까 - 공간 경험의 재발견
성수동 어느 카페에 들어섭니다.
높은 천장의 옛 공장 건물, 콘크리트 기둥과 노출된 배관, 빈티지 가구와 은은한 조명. 한쪽 벽에는 신진 작가의 그림이 걸려 있고, 바에서는 바리스타가 라떼아트를 그립니다. 스피커에서는 잔잔한 재즈가 흐릅니다.
당신은 무엇을 하러 온 건가요? 커피를 마시러? 친구를 만나러? 사진을 찍으러?
답은 ‘그 모든 것’입니다.
더 정확히는, ‘그 공간의 분위기를 경험하러’ 온 겁니다.
바리스타의 라떼아트는 왜 우리를 감동시킬까요?
그것은 ‘지금-여기’에서만 존재하는 일회적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미술관의 항구적 작품과 달리, 5분 뒤 사라질 예술. 커피를 마시는 순간에만 존재하는, 당신만을 위한 작품.
이것이 바로 ‘경험으로서의 예술’이 가진 힘입니다.
1960년대 플럭서스(Fluxus) 운동이 제안했던 ’사건으로서의 예술(art as event)’은 급진적 실험이었습니다. 백남준은 바이올린을 부수고, 요코 오노는 관객에게 자신의 옷을 자르게 했죠. 당시 미술계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게 예술이라고?”
그런데 2024년, 성수동 카페에서 그 급진성이 일상화되었습니다.
노출 콘크리트 벽은 도널드 저드의 미니멀리즘입니다.
빈티지 가구 배치는 공간 설치 작품입니다.
바리스타의 손놀림은 퍼포먼스 아트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미술관에서는 “만지지 마시오”라고 경고하지만, 카페에서는 당신이 그 경험의 일부가 된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앉은 의자, 당신이 마신 커피, 당신이 찍은 사진까지 모두 이 ‘총체적 예술 작품’의 일부입니다.
이것이 바로 현대의 경험 설계(Experience Design)입니다.
애플 스토어를 떠올려보세요. 단순히 아이폰을 파는 곳이 아닙니다. 넓고 밝은 공간, 만져볼 수 있는 모든 제품들, 친절한 제니어스 바, 무료 워크숍. 당신은 그곳에서 ‘애플이라는 브랜드의 철학’을 온몸으로 경험합니다.
건축가이자 디자이너 하니 라시드(Hani Rashid)는 “21세기 건축은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설계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미술관은 여전히 ‘작품’에 집중합니다.
카페와 애플 스토어는 ‘경험’에 집중합니다.
어느 쪽이 더 예술적일까요?
아마 당신은 ‘미술관’이라고 답하고 싶을 겁니다. 우리는 그렇게 배웠으니까요.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당신이 마지막으로 미술관에 간 게 언제인가요? 그리고 카페는요?
#3 넷플릭스 인터페이스도 큐레이션이다 - 그러나
금요일 저녁, 소파에 앉아 넷플릭스를 켭니다.
화면에는 정교하게 배열된 섬네일들이 펼쳐집니다.
“임상 님을 위한 추천”
“요즘 뜨는 콘텐츠”
“다시 보기”
“평점 98% 일치”
각 섬네일의 이미지는 당신의 취향에 맞춰 실시간으로 바뀝니다. 같은 영화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액션 장면이, 어떤 사람에게는 로맨스 장면이 섬네일로 표시됩니다.
스크롤의 속도, 섬네일의 크기, 자동재생되는 프리뷰 영상까지.
이 모든 것이 치밀하게 ‘설계된 경험’입니다.
넷플릭스의 UX 디자이너 나빈 아이엔거(Navin Iyengar)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영화를 파는 게 아니라 선택의 경험을 판다.”
이것이 바로 현대적 큐레이션입니다.
단순히 ‘무엇을 보여줄까’가 아니라 ‘어떻게 경험하게 할까’를 설계하는 것.
미술관은 작품을 시대순으로 나열합니다.
넷플릭스는 당신의 기분, 시간대, 시청 이력을 분석해 당신만의 전시를 만들어줍니다.
놀랍지 않나요?
하지만 여기, 함정이 있습니다.
넷플릭스의 알고리즘 큐레이션은 당신의 ‘취향을 확장’하는 게 아니라 ‘취향을 고착’시킵니다. 당신이 좋아할 만한 것만 보여주는 큐레이션은, 결국 당신을 안전지대에 가둡니다.
로맨스 코미디를 좋아하나요? 알고리즘은 영원히 로맨스 코미디만 추천할 겁니다.
다큐멘터리를 본 적 없나요? 알고리즘은 다큐멘터리를 보여주지 않을 겁니다.
이것을 ‘필터 버블(Filter Bubble)’이라고 합니다. 일리 파리저(Eli Pariser)가 2011년 경고했던 현상입니다. 알고리즘이 당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여주면, 당신의 세계는 점점 좁아집니다.
좋은 미술관 큐레이터는 관객이 ‘좋아할 만한 것’만 보여주지 않습니다.
관객이 ‘만나야 할 것’을 보여줍니다.
불편하더라도, 낯설더라도, 당신의 세계를 확장할 작품 말입니다.
제가 석파정 미술관에서 기획한 전시 중에 관객 만족도가 가장 낮았던 전시가 있습니다. 페미니즘을 다룬 현대미술 전시였죠. 어떤 사람들은 불편해했습니다. “왜 이런 걸 보여줘요?”
하지만 그 전시는 제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전시 증 하나 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보지 않으려 했을 것을 만나게 했으니까요. 편견이 깨지는 순간, 세계가 확장되는 경험. 그것이 진짜 큐레이션입니다.
넷플릭스는 절대 당신에게 불편한 영화를 추천하지 않습니다.
알고리즘은 당신을 편안하게 만들지만, 성장시키지는 않습니다.
진정한 안목은 알고리즘이 아니라, 저항과 선택 사이의 긴장에서 태어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여전히 인간 큐레이터가 필요합니다. 당신을 안전지대 밖으로 데려갈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 사람은 미술관 큐레이터일 수도 있고, 당신의 친구일 수도 있고, 당신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 '미술관을 버리고 놀이터로 가라'는 #1, #2 로 나누어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