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장을 버리는 기술

AI 시대, ‘아니오’의 미학

by 류임상

AI에게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면, 수초 만에 여러 장의 이미지가 쏟아집니다. 놀라운 점은 그중 상당수가 “꽤 괜찮다”는 것입니다. 기술적으로 완성도 있고, 구도도 나쁘지 않고, 색감도 그럴듯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곧 이상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문제는 만들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이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이런 고민이 필요 없었습니다. 물감을 개고, 캔버스를 준비하고, 붓을 드는 물리적 저항이 자연스러운 필터 역할을 했습니다. 한 점의 그림을 완성하려면 수일에서 수개월이 걸렸고, 그 시간 자체가 작품의 수를 제한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저항이 사라졌습니다. 생산의 마찰이 거의 제로에 가까워졌을 때, 창작의 무게중심은 조용히 이동합니다. 만드는 쪽에서, 버리는 쪽으로.


#1 미술사는 이미 ‘덜어냄’의 역사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미켈란젤로는 말했습니다. “나는 창조하지 않는다. 대리석 안에 이미 있는 형상에서 불필요한 것을 제거할 뿐이다.” 조각이란 처음부터 삭제의 예술이었습니다. 로댕에서 브랑쿠시로 이어지는 근대 조각의 흐름은 형태를 점점 더 덜어내는 과정이었고, 브랑쿠시의 「공간 속의 새」는 새의 형상을 거의 모두 버린 끝에 도달한 결과물입니다.


존 케이지는 더 극단으로 갔습니다. 「4분 33초」는 연주자가 무대에 앉아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는 곡입니다. 모든 의도된 소리를 버렸을 때 남는 것 — 객석의 기침, 바람 소리, 자기 자신의 심장 박동 — 이 음악이 된다는 선언이었습니다. 뒤샹의 레디메이드는 아예 만드는 행위를 통째로 버렸습니다. 남은 것은 순수한 선택과 맥락 부여뿐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미술사의 혁신적 순간들은 대부분 무언가를 더한 순간이 아니라 무언가를 과감하게 버린 순간이었습니다. AI 시대의 창작자는 이 오래된 계보 위에 서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가 다릅니다. 이전에는 덜어냄이 미학적 급진성의 표현이었다면, 지금은 생존을 위한 필수 능력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nim2me_A_vast_minimalist_white_gallery_space_with_only_one_sm_5b71253e-fba6-421b-a98a-e38632f9e5cd_0.png


#2 ‘아니오’에도 깊이가 있습니다


AI가 만든 천 장의 이미지 중 하나를 고르는 일을 단순한 취사선택으로 보면, 이야기는 금세 얕아집니다. 실제로 거기에는 최소 세 가지 층위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기술적 거부입니다. “이건 안 된다”는 판단. 비율이 이상하거나, 해상도가 낮거나, 구조적으로 결함이 있는 것을 걸러내는 일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고, 곧 AI 스스로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영역입니다. 가장 낮은 층위의 ‘아니오’입니다.


두 번째는 미학적 거부입니다. “이건 아름답지만, 내 것이 아니다”는 판단. 기술적으로 완벽하고 보기에도 좋지만,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과 맞지 않아서 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안목이 작동합니다. 핵심은 ‘좋은 것’을 버릴 수 있는 용기입니다. 괜찮은 것에 안주하지 않는 능력, 그것이 미학적 거부의 본질입니다.


세 번째는 존재론적 거부입니다. “이것은 존재하지 않아도 된다”는 판단. 가장 깊은 층위입니다. 이 작품이, 이 이미지가, 이 콘텐츠가 세상에 나와야 할 이유가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AI가 만들 수 있다고 해서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능성 자체를 거부하는 힘. 이것은 기술이 절대 대신해줄 수 없는 영역입니다.


#3 버려진 것들이 남겨진 것을 만듭니다


최종적으로 선택된 하나의 이미지는 버려진 999장의 그림자를 품고 있습니다. 관객은 버려진 것들을 볼 수 없지만, 그 부재가 남겨진 것의 윤곽을 규정합니다. 마치 조각에서 깎여나간 돌이 남은 형상의 표면을 결정하듯이.


전시 기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200점의 출품작 중 30점을 선택하는 일은 사실 170번의 ‘아니오’를 말하는 일입니다. 그 170번의 거부가 전시의 성격을, 서사를, 관객이 걸어갈 동선의 감정을 결정합니다. 넣은 작품이 전시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뺀 작품이 전시를 만듭니다.


이것은 일종의 부재의 디자인입니다. 건축가가 벽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빈 공간을 디자인하듯, 창작자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것을 디자인합니다. AI 시대에 이 원리는 더욱 선명해집니다. 가능성이 무한해진 만큼, 실현하지 않기로 한 것들의 총량도 무한해졌기 때문입니다.


nim2me_A_vast_minimalist_white_gallery_space_with_only_one_sm_5b71253e-fba6-421b-a98a-e38632f9e5cd_3.png


#4 가장 적극적인 형태의 창작


AI가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는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남은 인간 고유의 능력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능력일 것입니다.


이것은 체념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적극적인 형태의 창작입니다. 무한한 가능성 앞에서 하나의 방향을 택하고, 나머지를 의식적으로 놓아버리는 일.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보여주고, 침묵시킴으로써 말하게 하는 일. 이것이 큐레이터가 항상 해온 일이었고, AI 시대에 모든 창작자에게 요구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천 장을 만드는 기술은 이미 AI가 가지고 있습니다. 천 장을 버리는 기술은 여전히 우리의 몫입니다.



작가의 이전글스타일은 파일이 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