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적 결정체 안에서 우리가 지루함을 느끼는 이유에 대하여
최근 공개되는 AI 뮤직비디오들을 보면 경이로움과 피로감이 동시에 몰려옵니다. 분명 초현실적인 비주얼인데, 그 안을 채우는 구도와 인물은 놀라울 정도로 전형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왜 이 기술적 결정체에서 '지루함'을 느끼는 것일까요?
#1 데이터의 '평균'이 만든 표준화된 미학, 그리고 큐레이션의 부재
AI는 기본적으로 '가장 그럴듯한 것'을 찾아내는 확률 모델입니다. 수억 개의 데이터를 학습한 AI에게 "아름다운 영상"을 주문하면, AI는 그 데이터들의 통계적 평균치를 결과물로 내놓습니다. 대중이 가장 많이 소비하고, 가장 무난하다고 평가받는 '표준적 미학'이 출력되는 것이죠.
결국 개성 있는 파격보다는 모두가 적당히 만족할 만한 '예쁜 그림'들이 반복되면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개성을 잃은 미감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기술의 한계가 아닙니다. 바로 큐레이션의 부재입니다.
미술관에서 작품을 나열하는 것과 그것을 '전시'로 완성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행위입니다. 큐레이터는 수천 점의 작품 중에서 특정 맥락과 의도로 몇 점을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그 선택의 논리가 없는 나열은 아무리 개별 작품이 뛰어나도 관람객을 지치게 만들죠. 지금의 AI 영상도 마찬가지입니다. 통계적 평균을 출력하는 것은 생성(Generation)이지, 큐레이션(Curation)이 아닙니다. 데이터의 평균값에는 선택의 의지가 없고, 선택의 의지 없는 아름다움은 감동 없는 아름다움에 불과합니다.
#2 '스톡 푸티지'라는 안전한 감옥
우리가 느끼는 그 특유의 '광고 같은 느낌'은 학습 데이터의 출처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AI 비디오 모델은 저작권이 해결된 고화질 스톡 푸티지(Stock Footage)를 대량으로 학습합니다. 상업적 목적으로 제작된 스톡 영상들은 누구나 범용적으로 쓸 수 있도록 인물을 중앙에 배치하거나, 배경을 흐리는(Out of Focus) 지극히 안전하고 전형적인 구도를 취합니다.
AI가 이 문법을 정답으로 배운 탓에, AI 뮤직비디오 속 인물들은 마치 '유튜브 프리미엄 광고' 속 모델처럼 정형화된 움직임과 구도 안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스톡 푸티지는 '쓸모 있도록' 만들어진 영상입니다. 누군가의 프로젝트에 아무 마찰 없이 붙어 들어갈 수 있도록, 최대한 중립적이고 무해하게 제작됩니다. 마찰 없음은 곧 개성 없음을 의미합니다. AI는 그 마찰 없는 문법을 학습해, 마찰 없는 영상을 만들어냅니다.
예술적으로 강렬한 영상은 언제나 어떤 마찰을 품고 있습니다. 불편한 앵글, 예측 못한 컷, 의도적으로 흔들리는 카메라. AI가 배운 스톡 푸티지의 세계에는 그런 마찰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AI의 결과물은 기술적으로 완벽하지만, 예술적으로는 무균 상태에 가깝습니다.
#3 카메라 워킹에 담기지 못한 '물리적 의도'
실제 촬영 현장에서 카메라의 움직임은 감독의 감정과 의도를 담습니다. 긴장감이 고조될 때 카메라는 피사체를 향해 밀고 들어오고, 이별의 순간에는 천천히 멀어집니다. 핸드헬드(Hand-held) 기법의 미세한 떨림은 인물의 불안을 관객에게 신체적으로 전달합니다. 이 모든 것은 물리적 공간 속에서 사람이 만들어내는 의도의 언어입니다.
하지만 현재의 AI는 렌즈의 물리적 특성이나 공간감을 완벽히 이해하고 영상을 생성하지 않습니다. 그저 '다음 프레임에 올 픽셀의 확률'을 계산할 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복잡하고 역동적인 핸드헬드 기법보다는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플로팅 캠(Floating Cam)' 방식이 주를 이룹니다. 이 기계적인 매끄러움이 오히려 영상의 생동감을 앗아가고, 모든 장면을 둥둥 떠다니는 정적인 느낌으로 만듭니다.
감독은 카메라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가 '숨 쉬게' 합니다. AI 영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이질감의 상당 부분은 바로 이 호흡의 부재에서 옵니다.
#4 '공학적 센스'와 '미적 디렉팅' 사이의 간극
현재 AI 영상 제작의 최전선에 있는 이들 중 상당수는 기술적 구현에 능한 창작자들입니다. 이들은 영상이 '기술적으로 완벽하게(Glitches 없이)' 출력되는가에 집중합니다. 이것은 결코 비판이 아닙니다. 새로운 도구가 등장할 때, 그 도구를 처음 장악하는 사람은 언제나 기술적 감각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진기가 처음 등장했을 때도, 영화 카메라가 발명되었을 때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예술의 영역은 '묘사(Description)'가 아닌 '연출(Direction)'의 영역입니다. 단순히 석양 아래 걷는 여성을 '그려내는 것'과, 그 석양의 각도를 조절해 인물의 고독을 '표현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기술 숙련도가 높아진다고 해서 자동으로 미적 연출 능력이 따라오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다른 종류의 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지금의 AI 영상들이 미감이 아쉽다는 인상을 주는 건, 기술이라는 도구가 아직 진짜 미적 훈련을 거친 아티스트들의 손에 완전히 익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도구가 성숙하고 접근성이 높아질수록, 연출의 문법을 아는 사람들이 이 영역으로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기술과 미감의 진정한 결합이 시작될 것입니다.
#5 도구는 준비되었고, 이제 선택이 필요합니다.
AI는 성능 좋은 주방과 같습니다. 냉장고는 가득 차 있고, 조리 도구는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주방 기기의 성능을 시험하는 단계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짜 기대하는 것은 그 주방에서 탄생하는 셰프만의 독창적인 '맛'입니다.
그 맛은 레시피를 정밀하게 따르는 것에서 오지 않습니다. 수천 가지 재료 중에서 오늘 이 순간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과감하게 덜어낼 것인가 — 그 선택의 집합이 요리를 음식에서 예술로 끌어올립니다. 큐레이션이란 결국 그것입니다. 가능성의 바다 앞에서 '이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AI 뮤직비디오가 '어디서 본 것' 같은 이유는, 아직 누군가가 진심으로 '이것'이라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머지않아 기술적 제약이 사라지고 진짜 미감을 가진 예술가들이 이 도구를 자유자재로 다루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천편일률적인 영상에서 벗어나 인간의 선택이 깃든 새로운 차원의 영상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기술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무엇이 의미 있는지를 아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