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단계로 나아갈 자격
#1
'퇴사하겠습니다.' 입안에서 몇 번을 굴려보아도 이 말은 참 딱딱하고 차갑습니다.
'물러날 퇴(退)'에 '모일 사(社)'. 모임에서 물러난다는 이 말은, 마치 내가 있던 자리에서 밀려나거나 도망치는 듯한 묘한 패배감을 줍니다.
하지만 저는 지난 시간 동안 책상 앞에서 도망친 적이 없습니다. 기획안을 밤새 고쳐 메일을 보내던 새벽 두 시, 마감을 앞두고 자료를 들여다보던 저녁들. 그런 시간들을 통과하며 나만의 '업(業)'을 쌓아왔을 뿐입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이 이별의 이름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이것은 퇴사가 아니라 '졸업'입니다.
#2
졸업(卒業)이라는 한자를 뜯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칠 졸(卒)'에 '업 업(業)'.
여기서 '졸'은 단순히 끝난다는 의미를 넘어, 맡은 바 임무를 훌륭히 완수해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업'은 내가 정성을 들여 일궈낸 나만의 자산을 의미합니다.
결국 졸업이란,
'내가 쌓아온 소중한 자산을 충분히 완성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자격을 얻었다'는 선언입니다.
돌이켜보니 그랬습니다. 처음의 서툴던 저는 회사의 시간들을 통과하며 조금 더 단단해졌습니다. 나만의 업무 리듬을 찾았고, 때로는 서로의 실수를 감싸주며 동료에게서 '사람'을 배웠습니다. 저는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출근한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이라는 커다란 책의 한 챕터를 성실히 써 내려온 것입니다.
#3
졸업이 단순한 끝맺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저는 이제야 제대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그 시절을 단순히 '지나간 일'로 흘려보내는 것과, 그 안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찬찬히 되짚어보는 것은 전혀 다른 출발점을 만들어냅니다. 전자는 그저 나이를 먹는 일이고, 후자는 성장을 자산으로 전환하는 일입니다.
사회생활의 졸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간을 '빨리 잊고 싶은 과거'로 두는 사람과, '내가 여기서 무엇을 얻었는가'를 천천히 들여다보는 사람은 다음 챕터의 첫 문장부터 달라집니다. 졸업의 의미를 제대로 돌아보는 일은 감상이 아니라 준비입니다. 지나온 시간을 정직하게 바라볼 때, 비로소 내가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4
그래서 저는 서두르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 문을 나서기 전에, 여기서 쌓인 것들을 한 번은 제대로 세어보려 합니다. 어떤 실패에서 무엇을 건졌는지, 어떤 관계가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는지, 그리고 내가 진짜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 목록이 곧 다음 학년의 교과서가 될 테니까요.
단단한 졸업이 단단한 시작을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