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가 죽으면, 큐레이터가 산다

AI 음악 시대의 저자성에 대하여

by 류임상

#1. 어느 날


Suno 앞에 앉아 완성된 곡을 처음 들었을 때, 저는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혔습니다.


잘 만들었다.


그 생각이 스쳐 지나간 직후, 저는 멈칫했습니다. 잘 만든 것은 누구입니까. 제가 한 일은 몇 줄의 프롬프트를 입력한 것, 그리고 생성된 네 개의 버전 중 하나를 고른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자연스럽게 "내가 만든 곡"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감각은 착각인가, 아니면 정직한 직관인가.


매주 AI로 음악을 만들고, 영상을 만들고, 그것을 세상에 내보내는 사람으로서 — 저는 이 질문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습니다.


나는 내 음악의 저자인가, 아닌가.



#2. 저자성은 발명된 개념이다


먼저 짚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저자성(authorship)은 인류가 오래전부터 자연스럽게 갖고 있던 개념이 아닙니다.


중세까지 글을 쓰는 사람은 신의 말씀을 받아 적는 자였습니다. 텍스트의 권위는 신에게 있었고, 쓰는 자는 통로였습니다. 음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흐는 자신의 악보에 S.D.G. —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 라고 새겼습니다. 저자는 없었습니다. 창조자는 따로 있었고, 인간은 그 창조를 지상에서 받아 적는 자였습니다.


저자가 개인에게 귀속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입니다. 인쇄술이 텍스트를 대량으로 유통시키고, 저작권법이 그 텍스트에 소유권을 부여하면서 — 저자성은 철학적 발견이 아니라 경제적, 법적 발명으로 탄생했습니다. 누군가 만든 것을 누군가 팔 수 있으려면, 먼저 그것을 만든 사람이 특정되어야 했습니다.


이것을 기억해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AI 음악의 저자는 누구인가"를 묻는 것은, 사실 그 질문의 이면에 다른 질문을 감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익은 누구에게 귀속되는가. 권리는 누가 갖는가. 철학적 물음처럼 보이지만, 뿌리는 산업적 물음입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그 법적 질문이 아니라, 더 순수한 질문 앞에 서고 싶습니다. 경제를 걷어내고 나면 — 저자성이란 무엇인가.


#3. 기존의 답들은 왜


흔히 제시되는 답은 세 가지입니다. 그리고 세 가지 모두, 어느 지점에서 균열이 생깁니다.


첫 번째 답 — "AI는 도구일 뿐, 사용자가 저자다"


그래픽 디자이너 A씨를 생각해봅니다. 그는 20년째 포토샵으로 작업합니다. 포토샵이 그림을 대신 그려주지는 않습니다. A씨의 손이 마우스를 움직이고, A씨의 눈이 색을 판단합니다. 그는 당연히 자신의 작업물에 저작권을 주장합니다. 포토샵은 도구입니다.

어느 날 A씨는 AI 이미지 생성 툴을 써봅니다. "비 오는 서울 골목, 노란 우산, 필름 감성"이라고 입력했더니 — 자신이 몇 시간을 작업해도 나오기 어려운 이미지가 3초 만에 완성되었습니다. 그는 이것도 자신의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잠깐 멈칫합니다.

붓은 화가의 손이 움직이는 방향으로만 움직입니다. 그러나 AI는 입력한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결과물을 만들어냅니다. A씨가 입력한 것과 A씨가 받은 것 사이에는 거대한 블랙박스가 있습니다. 도구는 의지를 연장하지만, AI는 의지를 번역합니다. 그 번역의 주체는 누구입니까.


두 번째 답 — "의도가 있었으므로 저자다"


직장인 B씨는 오래전부터 소설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문장이 잘 나오지 않아 늘 포기했습니다. AI에게 이렇게 입력했습니다. "40대 이혼 남자가 혼자 라면을 끓여 먹는 장면. 슬프지만 슬프다고 말하지 않는 문체로." 결과물이 나왔습니다. 꽤 좋았습니다.

B씨의 의도는 분명히 B씨의 것입니다. 그 장면을 떠올린 것도, 그 감정의 결을 지정한 것도 B씨입니다. 그러나 결과물 속 한 문장 — 자신이 평생 써도 쓸 수 없었을 아름다운 문장 — 앞에서 그는 저자라고 느낍니까, 독자라고 느낍니까.

의도는 창작의 시작일 수 있지만, 결과물의 저자를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영화감독은 콘티에 의도를 담습니다. 그러나 배우의 즉흥 연기가 영화를 살릴 때 — 그 순간의 저자는 감독입니까, 배우입니까. 의도가 저자성의 근거라면, 그 의도가 미치지 못한 자리에서 태어난 것들은 누구의 것입니까.


세 번째 답 — "선택했으므로 저자다"


유튜버 C씨는 Suno로 매주 곡을 만듭니다. 생성된 여러 버전을 듣고, 마음에 드는 하나를 고릅니다. 편집하고, 영상을 붙이고, 업로드합니다. 구독자들은 좋아합니다.

어느 날 친구가 묻습니다. "이 노래 네가 만든 거야?" C씨는 잠깐 머뭇거립니다. "응"이라고 답하기엔 무언가 걸립니다. "아니"라고 답하기엔 억울합니다. 선택한 것은 분명히 자신인데 — 그 선택만으로 저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

선택이 저자성을 만든다면, 쇼핑몰에서 옷을 고르는 것도 창작입니까. 레스토랑 메뉴에서 음식을 고르는 것도 요리입니까. 선택에는 분명히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러나 선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무언가가 더 필요합니다.

세 가지 답 모두 같은 곳에서 균열이 생깁니다. 우리가 저자성을 무언가를 만드는 행위에 연결해왔기 때문입니다. 그 연결을 끊어야 비로소 새로운 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4. 바르트가 말한 것, 그리고 그 한계


롤랑 바르트는 1967년 「저자의 죽음」에서 선언했습니다. 텍스트의 의미는 저자의 머릿속에 있지 않고, 독자가 읽는 순간 생성된다고. 저자라는 인격이 텍스트를 지배한다는 환상을 해체하자고.

그렇다면 AI 음악은 바르트의 테제가 완성되는 장면인가. 마침내 저자 없이 탄생한 음악이 등장했으니.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깁니다.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곡이 좋아 Shazam으로 검색한 D씨. 결과 화면에 "AI Generated"라고 뜹니다. 방금 전까지 느꼈던 감동이 미묘하게 흔들립니다. 소리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멜로디도, 화음도, 리듬도 — 1초 전과 완전히 동일합니다. 그러나 경험은 달라졌습니다.


저자가 사라졌는데, 저자의 정체가 여전히 의미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르트의 테제가 완성되는 장면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테제의 한계가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텍스트만 읽는 것이 아니라, 그 텍스트가 어디서 왔는지를 함께 읽습니다. 인간의 고통에서 나온 음악과, 알고리즘에서 나온 음악을 — 설령 소리가 같아도 — 같은 방식으로 듣지 않습니다.

저자성은 텍스트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자와 텍스트 사이의 관계의 역사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가 없는 곳에서, 우리는 무언가 빠진 것을 감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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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거부의 저자성


그러나 AI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은, 너무 빨리 포기하는 것입니다.


20년 경력의 출판 편집자 E씨를 생각해봅니다. 그는 한 번도 소설을 쓴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손을 거친 작가들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가 "이 문장은 빼세요"라고 말할 때 — 그 판단은 어디서 옵니까. 20년의 독서에서, 20년의 실패한 원고들에서, 20년의 독자 반응에서 옵니다.


E씨는 저자입니까, 아닙니까.


저는 그가 저자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다른 방식의 저자입니다. 그는 거부의 저자입니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릴지를 결정하는 사람. 가능성들 앞에서 끊임없이 아니오를 말하는 사람. 그 아니오의 집적이 — 결국 하나의 책을 세상에 남깁니다.


Suno 앞에서 제가 실제로 하는 일을 다시 들여다봅니다. 저는 여러 개의 버전을 듣습니다. 하나는 너무 밝습니다. 하나는 리듬이 제가 원하는 감각과 다릅니다. 하나는 좋지만 아직 아닙니다. 하나를 고릅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변주하고, 반복하고, 또 고릅니다.


저는 소리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끊임없이 아니오를 말했습니다. 이 아니오의 집적이 — 결국 하나의 곡을 세상에 남겼습니다.


베토벤도 수십 번의 초고를 버렸습니다. 조각가는 돌에서 필요 없는 부분을 제거합니다. 그들 모두는 가능성들 앞에서 거부를 반복한 사람들입니다. AI는 그 구조를 더 선명하게 드러낼 뿐입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펼쳐놓고, 거부할 대상을 풍성하게 제공합니다.


그렇다면 저의 거부는 어디서 옵니까. 20년 동안 전시를 만들며 축적한 감각에서 옵니다. 수천 번 음악을 듣고, 공간을 설계하고, 관람객의 얼굴을 바라보며 쌓아온 판단에서 옵니다. AI는 무한한 가능성을 펼쳐놓지만, 그 가능성 앞에서 어느 것이 더 진실에 가까운지를 감지하는 것은 — 여전히 저입니다.


저자성이란 무엇을 만들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거부했는가의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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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저자가 죽으면, 큐레이터가 산다


바르트가 저자를 죽인 자리에, 그는 독자를 세웠습니다.


저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고 싶습니다. AI 시대에 저자의 자리에 서는 것은 독자가 아니라 큐레이터입니다.

큐레이터는 만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의미 있는지를 판단합니다. 큐레이터는 새로운 것을 생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릴지를 결정합니다. 그 결정의 집적이 — 하나의 전시가 되고, 하나의 음반이 되고, 하나의 예술적 목소리가 됩니다.


다시 C씨로 돌아갑니다. 매주 Suno로 곡을 올리는 그 유튜버. 1년이 지났을 때 구독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 채널 곡들은 분위기가 일관되게 느껴져요. 뭔가 당신다운 느낌이 있어요."

C씨는 소리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C씨만의 거부의 역사가 — C씨만의 목소리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저자성이 아니라면, 무엇입니까.


AI가 생성의 영역을 가져가는 것처럼 보이는 지금, 인간에게 남는 것은 선택의 근거입니다. 왜 이것인가. 왜 저것이 아닌가. 그 근거는 데이터가 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살아온 시간에서만 옵니다.

저는 이 노래의 작곡가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노래는, 저 없이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거부들, 저의 판단들, 저의 20년이 — 이 소리를 세상에 남겼습니다.


저자가 죽은 자리에서, 큐레이터는 다시 살아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