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승리
술 먹다 옆 테이블에서 시비가 붙어도 먼저 사과한다. 길을 걷다가 누군가 어깨를 치고 지나가도 먼저 사과하고, 그러려니 넘긴다. 내가 시간을 쓸 가치가 없는 상대에게는 한없이 너그럽다. 이런 상황이 자존심 상하지 않는다. 싸워서 얻을 게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잃을 게 없을 때 가장 패기 있다. 나도 그랬다. 처음 취업을 준비할 때는 어디든 붙기만 하면 좋다는 마음으로 여기저기 지원했다. 떨어져도 다른 곳을 가면 되지, 평이 좋지 않은 회사라도 내가 잘하면 되지, 그렇게 주저함 없이 도전했다. 그때는 경력을 쌓는 것이 목표였고, 잃을 게 없었으니 패기가 나왔다.
지금은 함부로 회사를 그만두거나 이직을 고민하는 일이 쉽지 않다. 서른을 앞두고 더 나은 곳으로 옮길 수 있을까 걱정하며 신중하게 행동한다. 나에게도 지켜야 할 것이 생겼으니까.
지킬 것이 있다고 생각하니 행동이 조심스러워졌다. 시비 거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미래를 잃어도 아깝지 않은 인생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사람들과 같은 부류가 되고 싶지 않다. 이렇게 생각하니, 먼저 사과하고 지나가는 처세가 전혀 자존심 상하지 않고 오히려 내 마음이 평온해졌다. 쉬운 예시로 의사가 깡패와 싸워서 얻을 게 있을까?
다만, 잃을 게 있다는 이유로 내 패기가 너무 사라진 것 같아 아쉬운 마음도 있다.
살다 보면 패기와는 점점 멀어지게 되는 거 같다. 지켜야 할 것들이 늘어가니까.
현실과 타협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결국 현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