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상일기
세계를 이해하는 데 유용한 두 가지 심리학적 렌즈가 있다. 하나는 임상심리학자 조던 피터슨(Jordan B. Peterson)이 『의미의 지도(Maps of Meaning)』(1999)에서 제시한 질서와 혼돈의 구도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심리학자 아리 크루글란스키(Arie W. Kruglanski)가 40년간 연구하여 『불확실한 걸 못 견디는 사람들(Uncertain)』(2024)에서 대중적으로 풀어낸 인지적 종결 욕구(Need for Cognitive Closure) 이론이다.
피터슨에 따르면, 인간은 세계를 두 가지 근본 범주로 경험한다.
질서(Order)란 단순히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이미 알려진 영역, 즉 기지의 영역을 뜻한다. 구체적으로는 사회적 규범, 습관, 예측 가능한 환경, 위계구조 등 우리가 행동의 결과를 합리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질서를 추구한다는 것은 억압과 권태가 동반되더라도 기존의 것, 기지의 영역, 안정감, 예측성, 확실성 같은 것들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질서 안에서 인간은 안정감, 포근함을 느끼지만, 지나친 질서는 경직성, 억압, 정체, 무료함, 권태로 이어진다. 신화적, 서사적 상징으로 “위대한 아버지(Great father)”의 이중성으로 표현되는데, 질서는 "현명한 왕(Wise King)"과 "폭군(Tyrant)"이라는 양면으로 표현될 수 있다.
같은 질서라도 건강하게 작동하면 현명한 왕이고, 부패하면 폭군이 되는 것이다.
혼돈(Chaos)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 예측할 수 없는 것, 우리의 기존 이해 틀이 붕괴되는 영역, 즉 미지의 영역을 말한다. 혼돈 속에서 인간은 불안감과 공포, 혼란을 느끼지만 한편으로 해방감, 자유, 깨달음 등의 긍정적 정서를 얻기도 한다. 혼돈을 추구한다는 것은 불안과 공포를 느끼더라도 새로운 것, 미지의 영역, 불확실성, 기존의 체계를 깨 드리는 것, 무질서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직장을 잃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떠나거나,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할 때 우리는 혼돈 속에 던져진다. 신화적, 서사적으로는 "위대한 어머니(Great Mother)"의 이중성으로 표현되는데, 혼돈은 파괴적(용, 괴물, 심연, 불안, 혼란)이면서 동시에 창조적(새로운 가능성, 변화의 원천)이다. 같은 혼돈이라도 건강하게 작동하면 창조적이고, 과하면 파괴적이다.
피터슨의 핵심 주장은 질서와 혼돈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며, 인간이 이 두 영역의 경계에 자발적으로 설 때 — 충분히 안정적이되 적절한 도전이 있는 지점에서 — 의미를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의미를 쉽게 말하면 “당신이 올바른 장소에 올바른 시간에 서 있을 때 느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책에 분명하게 정의하지는 않았다. 의미란 삶을 충만하게 해주는 긍정적 정서 혹은 경험이라고 이해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그는 이것을 도교의 음양(陰陽) 상징과 유사한 구조로 설명하는데, 혼돈(음)과 질서(양)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 이상적인 상태이며 그때 경험하는 것이 의미(도, 道)라는 것이다.
크루글란스키의 종결 욕구 이론은 이 구도에 경험적 정밀성을 부여한다. 종결 욕구란 "어떤 질문에 대해 확실한 답을 얻고 싶어 하고, 모호함을 혐오하는 동기적 상태"로 정의된다. 단순히 "확실한 게 좋다"는 선호가 아니라, 불확실성이 주는 심리적 고통을 빠르게 종료시키려는 동기적 상태(motivational state)를 말한다.
중요한 것은 종결 욕구가 두 가지 차원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마다 다른 안정적 성격 특질(trait) 혹은 기질(temperament)이면서, 동시에 상황에 의해 일시적으로 높아지거나 낮아질 수 있는 상태(state)이기도 하다.
크루글란스키는 종결 욕구의 수준이 여러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고 본다. 유전적 소인(기질적으로 모호함에 대한 내성이 낮은 사람이 있음), 애착 유형(불안정 애착이 종결 욕구를 높일 수 있음), 문화적 차이(집단주의 문화에서 종결 욕구가 더 높게 나타나는 연구 결과가 있음), 그리고 상황적 요인(시간 압박, 피로, 정보 과부하)이 있다.
정리하면, 각 개개인은 선천적으로 종결 욕구가 약할 수도 있고 강할 수도 있으며, 그와 무관하게 시간 압박, 피로, 소음, 정보 과부하 같은 스트레스가 가해지는 조건에서 누구든지 종결 욕구가 일시적으로 높아지기도 한다.
이 욕구가 과잉 활성화되면 두 가지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1. 포착(Seizing) — 충분한 증거 없이 처음 접하는 정보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는 것.
: 종결 욕구가 높으면 사람은 판단을 내리기 위해 처음 접하는 정보를 성급하게 붙잡는다. 충분한 증거를 수집하기 전에 초기 단서만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이것은 크루글란스키가 말하는 긴급성 경향(urgency tendency), 즉 "가능한 한 빨리 종결에 도달하려는 충동"에서 비롯된다.
2. 동결(Freezing) — 일단 내린 결론을 굳건히 유지하고 반증을 무시하는 것.
: 일단 결론에 도달하면, 그 판단을 굳건히 유지하고 새로운 정보에 의해 흔들리지 않으려 한다. 이후에 반증이 나와도 무시하거나 기각한다. 이것은 영속성 경향(permanence tendency), 즉 "한번 얻은 종결을 최대한 오래 보존하려는 충동"에 해당한다.
이 두 과정이 결합되면, 사람은 정보 처리의 범위가 축소된다. 첫인상에 과도하게 의존하고(초두 효과 강화), 대안적 가설을 탐색하지 않으며, 기존 판단에 반하는 증거를 체계적으로 경시하게 되는 것이다.
크루글란스키의 연구에 따르면 종결 욕구가 높은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경향을 보인다.
인지적으로 — 흑백논리적 사고, 고정관념에 대한 의존도 증가,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범주로 세계를 분류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구체적 사례의 예외를 인정하기보다 광범위한 규칙을 선호한다.
대인 관계에서 — 집단 내 동조 압력을 강화하고, 이탈자에 대해 비관용적이며,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선호한다. 집단의 합의가 빠르게 형성되지만, 그 합의의 질은 떨어질 수 있다.
사회·정치적으로 — 권위주의적 리더십에 대한 선호, 편견과 차별의 증가, 극단주의와 포퓰리즘에 대한 취약성이 높아진다. 크루글란스키는 이 메커니즘으로 급진화(radicalization)와 테러리즘까지 설명을 확장한다.
크루글란스키는 수십 년간의 실험을 통해 종결 욕구가 높은 사람일수록 고정관념에 의존하고, 흑백논리적 사고를 하며, 권위주의적 리더십을 선호하고, 극단주의에 취약하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입증했다.
위 두 렌즈를 겹치면 흥미로운 대응 관계가 드러난다. 피터슨이 말하는 폭군적 질서 — 이견을 억압하고, 단일한 서사를 강제하며, 복잡성을 허용하지 않는 경직된 체제 — 는 크루글란스키가 말하는 종결 욕구 과잉 상태의 정치적 체현이다. 반대로 피터슨이 말하는 혼돈에의 함몰 — 어떤 구조도 없이 모든 것이 해체되는 상태 — 은 종결 욕구가 극도로 낮아 어떤 판단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마비 상태에 해당한다.
이 글에서 제기하려는 주장은 이것이다. 질서와 혼돈의 추구는 역사적으로 사이클을 이루며, 현재 우리는 질서의 시대의 초입에 서 있다.
피터슨과 크루글란스키의 이론은 모두 개인 심리를 다루지만, 이것을 집단의 차원으로 확장하면 시대의 거시적 흐름을 읽는 틀이 된다. 수많은 개인의 심리적 경향이 축적되면 그것은 문화가 되고, 정치가 되고, 경제 정책이 된다. 한 시대의 사람들 대다수가 혼돈을 향해 기울면 세계는 개방, 자유, 탈위계, 세계화의 방향으로 움직인다. 반대로 대다수가 질서를 향해 기울면 세계는 폐쇄, 통제, 위계 강화, 자국 중심주의의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이 기울기는 영원하지 않다. 질서가 지나치면 경직과 억압에 대한 반발이 축적되어 혼돈을 향한 에너지가 폭발하고, 혼돈이 지나치면 불안과 해체에 대한 공포가 축적되어 질서를 향한 갈망이 분출된다.
20세기 초반을 돌아보자.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세계는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 제국주의의 팽창 속에서 기존 질서가 흔들리는 혼돈의 시기를 겪고 있었다. 전통적 가치 체계가 무너지고, 니체가 예언한 "신의 죽음" 이후 의미의 진공 상태가 확산되었다.
그 결과 무엇이 왔는가. 사람들은 불확실성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강력한 리더, 민족주의, 극단주의, 단일한 이데올로기에 매달렸다. 피터슨의 언어로 말하면 폭군적 질서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파시즘, 나치즘, 스탈린주의는 모두 혼돈에 대한 공포가 낳은 과잉 질서의 산물이었다. 포착(성급하게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붙잡음)과 동결(반증을 억압하고 이견을 처벌함)이 국가 단위로 작동한 것이다. 그 귀결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세계는 다시 반대 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전후 재건, 경제 성장, 그리고 질서의 시대가 남긴 트라우마(전체주의의 참상) 속에서 사람들은 경직된 질서를 벗어나고자 했다. 1960~70년대의 반문화 운동, 시민권 운동, 페미니즘, 성 혁명은 혼돈을 향한 집단적 이동의 표현이었다. 이후 세계화, 인터넷의 등장, 냉전 종식은 이 흐름을 더욱 가속했다. 국경이 희미해지고, 정보가 자유롭게 흐르고, 위계와 선입견이 도전받고, 개방성이 미덕으로 칭송받는 시대 — 혼돈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도래한 것이다.
최근까지 우리는 이 혼돈의 시대 안에 살고 있었다. 자유, 개방성, 기존 질서의 해체, 세계의 연결 — 이 모든 것이 시대의 지배적 흐름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혼돈의 핵심 도구였던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가 역설적으로 질서의 시대를 촉발하는 방아쇠가 되었다.
한스 로슬링(Hans Rosling)은 『팩트풀니스(Factfulness)』(2018)에서 이 메커니즘을 정면으로 다룬다. 로슬링이 밝힌 인간의 10가지 본능 중 부정 본능(Negativity Instinct)과 공포 본능(Fear Instinct)은 이 맥락에서 특히 중요하다. 부정 본능은 좋은 것보다 나쁜 것에 주목하는 경향이고, 공포 본능은 실제 위험과 무관하게 공포를 유발하는 것에 과잉 반응하는 경향이다. 로슬링은 데이터를 통해 세계가 빈곤, 질병, 폭력, 문맹 등 거의 모든 지표에서 과거보다 지속적으로 개선되어 왔음을 보여준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세계가 점점 나빠지고 있다고 믿는다. 왜인가. 로슬링의 답은 명확하다. 미디어가 부정적 사건을 선택적으로, 집중적으로, 반복적으로 보도하기 때문이다. 자연재해는 전체 사망자의 0.1%에 불과하고 테러는 0.05%에 불과하지만, 뉴스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이다.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 역시 『현대 사회 생존법(How to Survive the Modern World)』(2024)의 「매체」에서 유사한 진단을 내린다. 보통은 현대인이 뉴스에 중독되어 있으며, 이 중독의 근저에는 존재론적 불안이 있다고 분석한다. 우리는 세상이 무서워서 뉴스를 보고, 뉴스를 볼수록 세상이 더 무서워지는 악순환 속에 있다. 미디어는 공포, 두려움, 분노 같은 감정을 증폭하면서 우리를 그 굴레에 종속시킨다. 보통의 표현을 빌리면, 중세 시대에 종교가 하던 역할 — 세계관을 틀 짓고, 공포를 관리하고, 복종을 이끌어내는 역할 — 을 이제 미디어가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두 저자의 분석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구조가 보인다.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의 발달로 사람들은 지정학적 위협, 테러, 경제 위기, 팬데믹, 기후 재난에 관한 자극적이고 불안을 유발하는 콘텐츠에 24시간 노출되게 되었다. 그 결과 실제 세계보다 훨씬 위험한 세계 이미지가 집단적으로 구축되었다. 이 과장된 위험 인식이 집단적 불안을 키웠고, 불안이 커질수록 크루글란스키가 말하는 인지적 종결 욕구가 상승했다. 불확실성을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사람들은 확실한 답, 강력한 질서, 명확한 경계를 갈망하기 시작했다.
이 갈망이 현실 정치로 번역된 결과가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세계적으로 보수적, 국가주의적, 민족주의적 성향이 우세해지고 있다. 각 나라, 특히 강대국의 리더들은 질서 지향적 공약으로 권력을 잡았다. 방위비 증대, 국가자본주의적 경제 정책, 자국 중심주의 외교, 보호무역주의 — 이 모든 것이 혼돈(개방, 불확실성, 세계화)으로부터의 후퇴이자 질서(폐쇄, 확실성, 국경)를 향한 회귀다. 크루글란스키의 언어로 말하면, 집단적 포착(단순하고 강력한 서사를 붙잡음)과 동결(그 서사에 반하는 정보를 차단함)이 국가 단위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각 국가의 내부 역시 질서 추구의 양상을 보인다. 양극화, 흑백논리, 적과 아군의 명확한 구분, 적에 대한 혐오가 만연하다. 이것은 종결 욕구가 높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 패턴이다. (세계를 "우리 편"과 "적"으로 단순하게 분류하고(포착), 그 분류를 의심하지 않으며(동결), 이탈자를 처벌하는(비관용) 구조.)
역사가 보여주듯, 과잉 질서의 끝은 아름답지 않다. 20세기 초반의 교훈은 분명하다. 불확실성에 대한 공포가 집단적으로 폭주하면, 사람들은 폭군적 질서를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그 질서는 결국 자기 자신을 파괴한다.
피터슨은 도교의 음양(陰陽) 상징을 자주 인용한다. 흰색 안에 검은 점이 있고 검은색 안에 흰 점이 있듯이, 질서 안에는 항상 혼돈의 씨앗이 있고, 혼돈 안에는 항상 질서의 씨앗이 있다. 건강한 상태는 둘 중 하나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둘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질서의 시대에 우리가 의식적으로 지켜야 할 것은 혼돈의 미덕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개방성, 자기와 다른 의견에 대한 관용, "아직 모른다"는 상태를 견딜 수 있는 역량, 성급한 결론에 저항하는 지적 용기. 크루글란스키의 연구가 일관되게 보여주듯, 종결 욕구를 의식적으로 낮출 수 있는 사람 — 즉, 불확실성 속에서 판단을 유보하고, 복수의 가능성을 열어두며, 새로운 증거 앞에서 기존 입장을 수정할 수 있는 사람 — 이 더 나은 판단을 내리고, 더 적은 편견을 가지며, 극단주의에 덜 취약하다.
질서의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에게 필요한 것은, 시대의 흐름에 무조건 역행하는 것이 아니다. 질서에는 질서의 기능이 있다. 다만 질서 안에서도 혼돈의 점 하나를 지우지 않는 것, 확실성을 갈망하면서도 불확실성 앞에서 겸허할 수 있는 것, 포착의 유혹에 저항하고 동결을 경계하는 것 — 그것이 음양의 조화이고, 피터슨이 말하는 "질서와 혼돈의 경계에 서는 것"이다.
시대가 질서를 향해 기울수록, 혼돈의 미덕을 기억하는 정신이 더 귀해진다. 아마도 그것이, 사이클의 다음 국면을 조금이라도 덜 파괴적으로 맞이하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 참고 도서
- 조던 피터슨 <의미의 지도>
- 크루글란스키 <불확실성을 못 견디는 사람들>
- 로슬링 <팩트풀니스>
- 알랭 드 보통 <현대 사회 생존법>
- 레이 달리오 <빅 사이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