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잊고 싶은 흑역사가 있다

by 태이

2013년 20살의 나는 대학교 2학년이 되면서 학과 학생회를 2년 연속 참여하게 됐다. 1학년 때 워낙 빨빨거리며(?) 돌아다닌 탓에 여름 농활을 앞두고 학생회장 누나로부터 부탁을 하나 받았다. 농활대장이 되어 달라는 것. 농활대장은 농활 기획, 준비, 진행, 마무리까지 모든 과정을 진두지휘 해야 하는 중책이다. 처음엔 한사코 거절했으나, 대신할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그때는 몰랐다. 내 인생 최대의 흑역사를 스스로 만들거라곤.


꽤 긴시간(아마도 14박 15일 정도)을 농촌에 머물며 일을 도와드려야 하는 것이 농활대의 임무인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그 절반의 시간이 지나고 서울로 도망쳐 왔다. 내가 '도망쳐 왔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농대장으로서 제 역할을 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농활 경험은 여러차례 있어서 나름 자신 있었지만, 막상 농대장의 무게는 나에게 너무 무거웠다. 농활 중반 즈음에 접어들자 견딜 수 없이 마음이 우울해졌고 집이 그리워졌다. 더이상 고민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그곳을 떠나야 했다.


그래서 학생회장 누나에게 거짓말을 했다. 어머니가 아파서 올라가봐야 한다고. 누나는 그러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그는 나의 거짓말을 뻔히 알고 있었을 거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그런 눈치도 없거니와 집으로 가야겠다는 일념에 아무것도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버스를 타고 안락한 집으로 돌아왔다.


몇달 후, 몇 단계를 건너 학생회장 누나가 농활 후반부의 시간동안 정말 힘들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죄책감에 몸둘바를 모르겠더라. 나의 무책임으로 인해 내가 해야 하는 역할을 다른 누군가에게 떠밀었다니. 그리고 학생회장이라고 해봤자 나보다 2~3살 많은 사람 아닌가. 사실상 또래에게 일을 미룬거나 다름 없다. 그렇게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던 중 학생회장 누나와 둘이서 밥을 먹게 되었다.


솔직히 말했다. 어머니가 아프다는 건 거짓말이였고 너무 힘들어서 도망쳐 나와야 했다고. 그러자 누나는 괜찮다고 했다. 그럴 수 있는 상황이였다고도. 사실 정말로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 학과가 농활로 방문했던 마을에서는 청년회장이 대부분의 일을 연결해주고 우리를 관리했는데, 아침 6시마다 우리가 머무르는 회관의 문을 두드리고 술상을 차려오라고 했다. 후배들에게 술상 차리라고 할 수 없으니 내가 차리고 나면 청년회장은 꼭 나보고 앉아 술을 먹으라 지시했다. 그런 상황이 매일 반복됐다. 그런 상황이면 누구라도 도망치고 싶을 거다.


물론 도망을 선택했던 나의 결심은 여전히 옳지 않다. 사실대로 농활대원들에게 털어놓고 방법을 같이 찾으면 될 일이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무척 미숙했다. 책임감은 개인에게만 떠맡겨질 때 늘 최악의 상황을 초래한다. 함께 고민하고 해결할 때 비로소 최선의 출구전략이 보이는데, 당시에 새파란 젊은이들이 이런 걸 알 턱이 없었겠지.


지금 돌아보건데 내 죄를 고백할 때 괜찮다고 해주던 학생회장 누나가 정말 고마웠다. 그의 따뜻함이 없었다면 나는 죄책감으로 지금까지 고통받고 있었을 거다. 나의 부족함을 알고서도 토닥여줬던 사람이 있어서 오늘의 내가 있다. 학생회장 누나 덕분에 요즘의 나는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 되자고 노력하는 셈이다.


누군가의 흑역사는 흑역사로만 남지 않는다. 때론 성장의 기회로 변모하기도 한다. 실패로부터 배우고 자세를 고쳐먹기만 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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