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먼저 새해 인사를 하고 싶은 마음

결국 다정함을 먼저 건네지 못하고

by Ax

몇 년 전만 해도 새해가 밝는 걸 손꼽아 기다렸던 것 같다. 보고 싶은 이들에게 몇 줄의 다정함을 건네는 것이 좋아서. 1월 1일이 되기 전에 바지런히 손편지를 써놓고 한 장 한 장 사진을 찍어 보냈다. 새해를 기념하는 것이 성인이 되고 나서 했던 일 중에 가장 새로웠던 일 중 하나였던 것 같기도 하다.


새해 카운트다운을 두 세 번 해보니 그닥 재미가 없다는 걸 알았다. 아마 익숙해진 탓일 것이다. 더이상 인사는 하지 않고, 간간히 오는 연락에만 답장을 하곤 한다. 항상 의외의 연락들이 온다. 뜻밖의 다정함들. 나에게 없는 마음들. 그래서 올해는 부러 느지막히 일어났다. 새해니까 일찍 일어나야 하나 싶은 생각이 스치지만, 뭘 유난이냐며 12월 31일과 똑같이 하루를 시작한다.


아마 그런 무심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무언가 특별하고 다정한 일 하나쯤은 해야하겠다는 강박관념은. 저 카페는 너가 좋아할 것 같아. 누군가 촌스러운 노란색 외관의 카페를 가리키며 말한다. 또 하나의 다정함이다. 상상 속 그 카페의 주인장은 고집센 할아버지다. 새해 첫 날 느지막한 저녁엔 그 카페를 가보기로 했다. 생각보다 노란색이 아늑하다. 주인장은 고집센 중년이다. 손님이 들어오든 말든 무심한 말투에 괜히 오기가 생기는 그런 곳이다. 이곳에서 직접 만드는 케이크는 그 무심함만큼이나 달지 않아 맛있다. 무엇보다도 이곳엔 책이 많아 마음이 좋다. 김소연 시인이 모은 <한 글자 사전> 옆에서 보후밀 흐라발의 책을 읽었다. 생각보다 보후밀 흐라발의 책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그냥 펼쳐본 김소연 시인의 책은 시집만큼이나 다정하다.


무심함을 극복하기 위한 두 번째 장소는 108계단 끝에 놓인 작은 레스토랑이었다. 이제는 사람이 정말 많아진 해방촌 골목의 초입이다. 그렇지만 해방촌 중심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 빌라들 사이에 어색하게 위치해 있다. 주인은 단정한 검은 옷 차림이다. 요리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그 강단 있음 사이의 다정함이 보여 좋다. 예약해야 올 수 있는 식당이지만, 누군가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자리가 남아있다. 운이 좋게도 나는 그날 마지막 손님이었다.


막 자리에 앉았을 때 작별인사를 했던 대상은 강아지였다. 건너편 테이블에 앉은 중년의 부부가 말티즈 한 마리와 함께 있었다. 둘은 식사를 막 끝낸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터였다. 강아지는 그것이 샘이 나, 크게 한 번씩 세 번을 짖었다. 강아지의 주인은 그것이 곧 얼른 집에 가자는 말임을 알아듣는다. 다른 모양새의 대화가 퍽 다정하다. 품에 안긴 강아지는 이윽고 주인의 목소리와 손으로 우리에게 작별인사를 한다. 땅에 내려온 강아지는 자리가 찬 두 테이블을 각각 순회하며 인사를 한다. 강아지의 보송한 털을 만지는 것은 언제나 기분이 좋다. 붙임성이 좋은 강아지는 예쁨을 한껏 받고 다시 주인의 품으로 간다. 강아지의 주인은 우리에게 강아지와 인사를 시켜준 마음만큼이나 다정하다. 카드를 돌려받곤 강아지와 돌아서며 식당의 주인에게 말한다.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나는 이곳에 유독 다정한 사람들이 많은 건지, 새해 첫 날이 사람들을 다정하게 만드는 것인지 고민한다.


교회당 창문처럼 커다랗고 둥근 창 옆에서 식사를 했다. 외풍이 들어올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아직 매서운 추위가 찾아오지는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한다. 참 다정한 1월 1일이구나. 식당의 주인은 눈이 매웠을 것이다. 작은 공간을 알음알음 채워간 연기가 우리한테도 닿았기 때문이다. 요리들은 정성이 가득하다. 감자와 가리비 사이의 이음새가 잘 보이지 않는 것도 그랬고, 갈치속젓 향은 나지만 비리지는 않은 파스타도 그랬다. 주인의 다정한 옷매무새는 아마도 음식에도 듬뿍 묻어있는 것 같다. 음식을 먹으며 다짐한다. 꼭 내가 먼저 새해 인사를 건네야겠다. 다정한 하루를 만들어주어서 고맙습니다, 이런 마음을 담아.


나는 다정하지 않은 사람인 것 같다. 그새 새해 인사를 건네겠다는 다짐은 잊은 채 식당을 나서려고 했기 때문에. 그 뒷모습에 식당 주인이 먼저 새해 인사를 건넨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픈 마음에 뒤를 돌아 허겁지겁 똑같은 말을 건넨다. 집에 오는 길 내내 먼저 하지 못한 새해 인사를 곱씹는다. 다정함을 전해주지 못하고 받기만 한 것이 마음이 아파, 건네받은 다정함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을 떠올린다. 딱 하루만 가능한 다정함의 기회를 놓친 것이 못내 슬프다.


아마 너에게도 가닿지 못한 다정함들이 더러 있었을 것이다. 같이 발견할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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