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원 없음에 대한 소고

이제니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를 읽고

by Ax


누구에게나 아름다움의 반짝거림을 발견하는 순간들이 있다. 특히 예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서 각자가 발견했던 아름다움의 순간들을 듣는 것은 항상 즐겁다. 영화감독이 가장 좋아했던 영화를 이야기할 때, 좋아하는 평론가가 자신이 이 분야에 적을 두게 된 학부생 때의 기억을 말할 때. 나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다면 고등학교 2학년 때 몇 백 개씩 쌓아놓은 영화 파일 속에서 우연히 웨스 앤더슨 감독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을 봤을 때였다. 나는 그 영화를 보면서 많이 울었고, 울게 된 사실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겪어보지 않은 과거에 대해 이토록 집착하는 이가 어딘가에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근원 모를 그리움을 다정하게 풀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그동안 숨겨왔던 나의 이야기를 어떤 친구에게 모두 들려주었고, 이야기를 하던 공원 벤치에서 나는 아직도 내가 과거에 묶여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쩌면 앞으로도 과거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도. 물론 친구가 했던 위로는 (어차피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니의 시 또한 웨스 앤더슨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근원이 없는 노스탤지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마도 아프리카』의 가장 첫 번째 작품인 「페루」는 이러한 주제의식에 대한 안내서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내게 있었을지도 모를 고향”을 생각하는 것이 곧 이 시집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은 그것을 생각하는 것과 ‘말’로 나타내는 것이 서로 다른 문제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말은 “무의미하게 엉겨붙어버린” 것에 불과하기에. 이유 모를 그리움을 탐색하는 일은 따라서 굉장히 지난한 과정이 될 것이다.


기본적으로 그리움의 감정은 과거의 시간을 그 대상으로 한다. 인간에게 과거는 지금/여기의 자신을 만들어낸 시간이며, ‘어른’이 되기 이전의 시간이다. 따라서 이제니의 시집은 현재의 시간에 서서 과거를 바라보고, 과거의 자신과 끊임없이 조우하려고 한다. 시집이 청춘의 과도기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과거와 조우하려고 하는 순간 우리는 ‘내’가 타자가 되는 것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우리는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가 맞을까.” 이 지점에서 시인은 “과거를 묻지 않을 수 없”(「자니마와 모리씨」)다. 이때 자기 자신을 타자로 바라보는 순간들은 가장 잘 아는 것, 익숙한 것이 생경한 것이 될 때 주로 발생한다. 가령 자신의 이름이 “분홍 설탕 코끼리”에서 “풍선 풍선 풍선”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태도가 변하지 않거나(「분홍 설탕 코끼리」), 누군가의 이름을 종이 위에 흘려 써보았을 때 그 이름의 “우리는 함께 혼자”(「단 하나의 이름」)임을 느끼는 순간. 혹은 모순적인 것이 중첩되어 공존하는 이상한 상황에서도 타자화의 기제는 작동한다. “단 한번도 본 적 없는 알갱이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옥수수 수프를 먹는 아침」) 와중에 그 알갱이를 그리워하는 마음이나,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사탕과 식빵을 먹는 개미가 문득 “태어나는 순간부터 떠나고 싶었어요”(「독일 사탕 개미」)라고 외치는 것이 그렇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랑을 갈구하고 실체 없는 것에 대해 막연한 그리움을 느끼는 것은 ‘우리’라고 묶일 수밖에 없는—그러나 굉장히 연약한—과거와 현재의 ‘나’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 때문일 것이다. “내게서 가장 멀리 있는 것은 바로 나 자신”(「녹색 감정 식물」)일 테니.


그렇다면 과거는 대체 어떤 시간인가? 다시 말해 과거가 과거답지 않게 현재의 경계를 침범하려고 드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 일까?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과거가 현재까지 이어지는 수단인 “흉터”(「그믐으로 가는 검은 말」)에서 발견할 수 있다. 흉터는 과거가 현재에 남긴 상흔이다. 그 상흔을 통해 과거라는 아픔은 불현듯 찾아와 현재의 발목을 붙잡는다. 흉터를 떠올릴 때 ‘나’는 병들고 마침내 사라져 버린다. 이러한 시간 속에서 ‘나’는 “소멸되기를 거부하는 어떤 종류의 감정”, “각진 도형들의 감각으로 위로받고 싶은”(「모퉁이를 돌다」) 일종의 수동적인 마음들을 갖는다. 이는 누군가의 온기를 필요로 하고, 모호한 애상 가운데 형태가 분명한 직각에 기대고자 하는 외로운 마음이다.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후회한다. 가닿을 수 없는 과거 저편을 끊임없이 바라보는 자신을 질타한다. “반성하는 습관을 버린다면 나는 좋은 사람이 될 텐데”라고 말이다. 이때 저 세계에 다녀온 한 마리의 앵무는 누가 말했는지도 모르는 채 “모두들 잘 있다고만”(「눈 위의 앵무」) 말한다. 마치 저편을 자꾸만 바라보는 것을 멈추라는 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갈망한다. 결핍을 채우기 위한 무언가를 계속 찾아다닌다. 이렇듯 외로운 싸움에서 말을 걸어줄 수 있는 것은 과거의 ‘나’ 뿐이다. 어린아이가 외는 주문 같은 이름을 가진 “요롱이”가 ‘나’에게 건네는 말을 보자. “울지 말아요 울지 말아요. 당신만의 요롱이를 찾지 못했을 뿐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잖아요.” 이 지점에서 용서를 구하는 자, 잘못을 용서하는 자는 모두 요롱이의 언어를 사용한다. 게다가 ‘나’는 요롱이가 되고 싶고, 요롱이 또한 요롱이가 되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 요롱이를 과거의 ‘나’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이 요롱이의 가장 큰 특징은 “떠나온 자리를 매순간 들여다본다”(「요롱이는 말한다」)는 점이다. 결국 요롱이를 찾는 것, 요롱이가 되는 것은 우리 각자가 지나온 과거를 가만히 들여다봐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때서야 우리는 서로 다른 자아로 나뉜 현재의 시간을 봉합할 수 있다.


봉합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이 전략이 임시방편이라는 뜻이다. 언제든 실밥이 터지면 과거와 현재의 만남은 무화된다. 그러니 그 둘을 화해시키고, 모종의 동거를 가능케 하는 것은 완료되기 어려운 일이다. 아니, 완료가 아닌 진행의 시제로만 표현될 수 있는 사건일 것이다. 이 지점에서 시인이 지닌 시선의 특별함이 드러난다. 필연적으로 복원이 불가능한 시간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눈길이 다정하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불가능성 위에서 여전히 가능성과 다짐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결심한 ‘나’에게 “너는 긴 인생을 틀린 맞춤법으로 살았고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었다”(「밤의 공벌레」)고 말해주는 것. 그리고 그 틀린 맞춤법을 꺼내어 기록하게끔 만드는 것. 이것이 가장 다정하고 용기 있는 위로가 아니겠는가. 과거를 얼레벌레 지나온 이들이 하나씩 그 유해들을 꼼꼼하게 발굴하는 과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감동적이다. 그리고 그것의 동력이 마침내 자기 자신한테서 나온다는 것은 이 힘겨운 세계를 같이 살아가는 또 다른 ‘나’를 마주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웨스 앤더슨, 이제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비슷한 그리움을 품고 살아간다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그 사실만으로도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과거를 바라보겠다는 시인의 다짐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것은 앞서 요롱이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명명하는 수많은 이름들을 찾아 이들과 대화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가령 “뵈뵈”(「뵈뵈」)를 호명하며 사라지는 시간 속의 ‘나’에게 상처를 얘기해주려고 한다거나, 세계의 끝에서 만난 “여름 들판엔 홀리가 가득”(「들판의 홀리」)한 경험을 하고, 끊임없이 자라서 갇혀있는 줄도 모르는 “공원”에서 두이의 흔적을 느끼는 형태로 말이다. 우리는 뵈뵈, 홀리, 두이의 행동과 귓속말, 목소리 같은 것들을 이따금씩 느낀다. 그러나 공원의 끝과 끝을 가로지르는 와중에도 화자는 이들에게 도저히 닿을 수가 없다는 점을 깨닫는다. 결국 닿을 수 없는 것이 곧 두이를 비롯한 이름들이고, 공원 속에서 우리는 “울적하고 피로한 제자리걸음”(「공원의 두이」)을 걸을 뿐이다. 어쩌면 누군가는 손쉽게 현재를 과거의 바깥이라는 형태로 떠올릴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공원이라는 과거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다만 그곳에 ‘나’, 두이가 있다는 것은 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과거와 작별하고 온전히 현재를 살아내는 일? 그보다는, 공원에서 끊임없이 두이의 잔상을 통해 나를 옥죄던 소리, 느낌, 기억과 화해하는 일일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우리는 과거라는 시간과의 화해가 손쉽게 이루어지지도 않고, 그 결과가 기대와는 달리 무릇 희망적이기만 하지는 않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너무나도 많은 시간과 말을 경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시간은 아무리 생각해도 쌓이고 쌓여서 해결되지 않기도 한다. 마치 단단한 퇴적층처럼. 그러니 생각과 몽상의 숲, “사몽”에서 “서투른 문법으로 빗자루질을”(「사몽의 숲으로」) 한다고 한들, 나뭇잎은 계속 쌓여만 갈 것이다. 마찬가지로 “씌어진 문장이 쓰려던 문장인지는 분명하지 않다”(「피로와 파도와」)는 점을 깨닫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나아가 “떨어져나간 겉장, 제목도 없는 책”과 같은 인생을 읽어내려고 했지만 끝끝내 말로 뱉었을 때 그 발화에 대한 확신이 사라져 “완전히 침묵하는 법”(「갈색의 책」)을 배울까 고민하기도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실은 이미 너무 많이 이야기해버렸”(「밋딤」)다는 고백을 할 만큼, 과거에 발목 잡혀 사는 시간을 인지하는 것은 또다시 고독함을 만든다. 왜 그런 것일까? 아마도 과거라는 시간은 이미 “공백 여백”과 같은 시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근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노스탤지어의 발생은 아마도 A라는 과거에 대한 보상심리 때문일지도 모른다. B라는 다른 과거를 갈구하는 마음. 즉 이미 사라진 것들, 혹은 우리가 지나오지 않은 시간에 대한 갈망은 “공백으로만 기록”(「블랭크 하치」)되는 완결이 불가능한 형태의 사건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일, 즉 과거의 기억들과 화해하는 일은 가능한가? 과거에 마침표를 찍어낼 수 있는가? 잔인하게도 필자는 이제니의 시선에서 그러한 가능성을 읽어낼 수 없다.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일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사랑하는 이에게 “말할 수 없는 말”은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결국 화해의 말이다. 화해는 이별에서 다양한 형태로 가능할 것이다. 떠나가는 자에게 당신이 싫다고 말한다거나, 그 사람의 아픔을 묻는다거나, 혹은 미안하다고 말한다거나, 사랑한다고 외친다거나. 이 모든 것들이 불가능한 채 수많은 말들을 삼켜내고 단순히 “잘 가요”(「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라고만 말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기대한 바를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대신 다른 가능성이 있다. 가능성이라기보다 보다 적확한 설명이라는 표현이 맞겠다. 결국 어른이 되는 과정, 자신이 지나온 시간을 있는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마침표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다. 이 세계에서는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실연당한 것이 곧 히치콕의 영화 속 맥거핀을 찾아내는 것과 같은 유희가 된다. 마찬가지로 이곳은 “나는 나 자신과도 공통점을 갖지 못한다”(「편지광 유우」)는 고백을 통해 질서정연한 세계를 흩트리고, 그것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는 세계다. 이곳에서 “우리의 대답은 언제나 질문으로 시작해서 질문으로 끝나”(「발 없는 새」)게 된다. 마침표가 아닌 물음표의 세계인 것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시간을 사는 것이 아니라 견디기만 한다. live와 survive는 다르다. 후자의 상태에 놓인 이들에게는 언제나 이 시간 속에서 대체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가 빈칸이고 물음표다. 이곳에서 그들은 끊임없이 외침과 같은 물음을 던진다. “모두 어디에 계십니까. 모두 안녕히 계십니까.” 결과적으로 이러한 물음을 던짐으로써 이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가엾음을 느끼고, 그 가엾음은 이들로 하여금 “울면서 어른이 되게 했다.”(「무화과나무 열매의 계절」) 결국 과거에 묶여 있음을, 지나온 적 없는 시간에 대한 그리움을, 그리고 그것을 기다리는 마음을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곧 어른이 되는 일이 된다. 때로는 슬퍼할 줄 아는 것조차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하니까. 이는 곧 “물음을 울음으로 발음하는 밤”을 지나는 일과 다름없다. 그 시간 속에서 아이는 자기 자신을 짐짝처럼 여기고, 그 슬픔을 회피하고 그것에 거짓말을 하는 시간을 지나왔다. 그런데 마침내 영혼을 찌르는 잔인한 나뭇가지들을 가만히 보고 있을 때, 지금껏 발화하지 못한 슬픔이 등장하고 이것이 곱사등이의 뼈처럼 몸에 둥근 무언가가 생겨나는 것을 멈추게 만든다. 비로소 우리는 “조금 울고 어쩐지 자라나던 그것이 문득 작아진 것”(「곱사등이의 둥근 뼈」)을 느낀다. 그때서야 나지막이 고백한다, “마음이 넓어진 것 같다고 어제의 너는 말했습니다”(「나무 구름 바람」)라고.


사실 겉으로 보기에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전히 귓가엔 둥둥 북소리, 내 심장이 멀리서 뛰는 것만 같다.” 그러나 깨달은 점이 있다면 이 세계가 “그냥 있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마침표를 찍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계. 결국 스스로 단단해지고, 우리는 “얼룩이 남는다고 해서 실패한 건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린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나는 이 불모의 나날이 마음에 든다”(「별 시대의 아움」)고 읊조린다.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무언가가 생겨났다. 그 세계가 나의 과거로 빚은 현재라는 것이 퍽 다정하다. 우리는 때로 과거에 대해 괴로워하고 슬퍼하지만 나와 세계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더 넓은 마음으로 불모지를 끌어안는 것을 시도한다. 만나기가 불가능한, 지나온 세계를 떠올리는 것을 동력으로 하여 내달린다. “나를 달리게 하는 것은 들판이 아니라 들판에 대한 상상”이기에. 결국 기억을 더듬는 일은 “뒤로 간다는 말”이지만 “앞으로 간다는 말”과 다름없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되돌릴 수 없는 감정이 처음의 들판”(「처음의 들판」)을 달리는 경험을 한다. 다시 말해 겪어보지 않은 과거를 미래의 원천으로 삼는다. 이렇게 처음으로 새로운 시간이 생에 들어온다. 똑같은 그리움으로 살아가더라도 마음에 드는 것과 미래라는 희망이 새롭게 태어난 삶은 그전과는 분명 다르다. 이 “쓸모없는 아름다움만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그믐으로 가는 검은 말」) 겪어보지 않은 미래에 대한 동경은 희망이고, 겪어보지 않은 과거에 대한 동경은 예술이라 한다면 그것을 동시에 가로지르는 아름다움은 현재에서 발견된다. 이것이 곧 우리 생을 설명하는 어구이자 시간 사이의 느슨한 봉합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것임을 떠올리며 이제니의 시세계가 불러온 시간과 따스함을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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