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니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2019) 평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칠 수밖에 없었던 남자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얼마나 그 말을 하고 싶었으면. 가끔 너무 좋은 것, 귀여운 것을 보면 지구만한 크기의 구덩이를 파서 온 세상 사람들에게 그 좋음을 알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가장 최근에는 ‘스타워즈’ 시리즈를 보며 그 생각을 했다. 이제니의 시집을 읽으면서도 다시 한 번 구덩이를 파고 싶었다. 그렇지만 구덩이를 팔 수는 없으니 이 글에서라도 한 번 외쳐 본다. (너무 좋다!!!)
인생의 목표가 하나 있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것들에 좋고 싫음을 갖고, 그 이유를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좋아하는 것의 이유를 밝히는 것만큼이나 재미있는 일이 있을까. 물론 이유를 찾다보면 좋아하던 마음이 평평해져 인위적인 것이 되어버리기도 하지만, 대체로 너무 좋은 마음에서 시작해서 곰곰한 사유를 거쳐 나름의 단어들로 말을 해보면 더 많은 것들이 떠오르곤 한다. 그 오랜 시간을 견디게 만드는 것은 그 좋은 것을 만난 딱 처음의 기억이다. 일상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는 애인에게도, 가족에게도 너무나 무거운 단어처럼 느껴지지만 꼭 우연히 만나는 좋은 것들에는 사랑이라는 단어 말고 이름붙일 말이 없다. 예를 들어 좋은 글을 읽었을 때 느껴지는 울렁거림, 초조함, 알알함 같은 것들. 너무 강렬하고 자극적이어서 그 감각으로 온전히 남는 것들. 나는 그런 순간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에 실린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라는 시를 읽고 그 사랑 비슷한 것의 단상을 적어본다. 이 시를 읽었을 때, 3분 30초 내내 잔잔하다가 마지막 10초에 갑자기 싱그러운 기타 소리가 들리는 노래를 듣는 기분이었다. 어떤 숲이 눈앞에 갑자기 당도하는 느낌. 오로라를 봤을 때도 이 정도로 그림이 그려지는 느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죽기 전에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는 것이 어떤 느낌일까 항상 궁금했는데, 나는 죽지 않아도 그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대학생활부터 어린 시절, 거쳐 온 시간들과 글과 영화와 사람들이 하나씩 스쳐지나가고 나도 만났다. 소리 내어 읽다가 세 번 정도 멈추기도 했다.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는 이 시가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나 같다고 말해주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내 대학시절을 보는 느낌이라 좋았다. 누군가 간간히 내 삶에 들어와 찍어 놓은 나의 비디오테이프를 선물처럼 건네받아 보는 느낌이었다.
이런 사랑을 원동력 삼아 왜 이 시집이 좋을까 나름의 이유를 적어본다. 이제니의 첫 시집인 『아마도 아프리카』와 마찬가지로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또한 선형적이지 않은 그리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현재와 과거라는 화해할 수 없는 두 시간을 어떻게 봉합할 것인지, 그리고 그렇게 마주하는 혼곤한 세계 속에서 ‘나’라는 존재는 어떤 존재인지 탐구하는 시집이다. 두 시집에 차이가 있다면 후자는 화해할 수 없는 과거로부터 찾아낸 미래라는 새로운 시간을 함께 엮어서 본격적으로 탐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아프리카』에서 보이는 어딘가 쓸쓸하고 우울한 구석이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에서는 한층 옅어진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두 시집 사이에 놓인 시간은 화자를, 독자를 “거의 어른”(「멀어지지 않으려고 고개를 들어」)인 상태로 만들어 놓고 그 시간 속에서 알아낸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요컨대 어른도 아니고 아이도 아닌 거의 어른인 사람이 마주한 결론은 “사라진 뒤에야 들려오는 귓속말”(「여기에 그리고 저기에」)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형체 없는 것들을 복기하여 받아 적는 일은 뚜렷한 형체도 없이 ‘흘려 쓰는’ 것밖에는 될 수 없을 것이다. 사라진 것, 이미 없는 것. 그것은 곧 과거가 아닌가? 인과론적으로 생각해보면 과거는 현재의 이전이고, 현재를 만든 무엇이다. 그러나 시인의 세상에서 과거란 여전히 당도하지 않은 무엇이다. 예컨대 ‘빛’ 같은 것들. 우리가 지금 보는 별빛은 수억만 년 전에 먼 우주에서 일어난 폭발이 비로소 도착한 것이다. 그러니까 “옛날의 빛이 도착하고 있다. 아직까지도 오고 있다. 그곳에서 이곳으로.”(「발화 연습 문장-남방의 연습곡」) 따라서 “어제는 오늘 다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에서 미래에 가까워지고 있”(「한 자락」)다. 과거가 마무리되고 현재, 현재가 마무리되고 미래가 아닌 그 셋이 동시다발적으로 만나는 세계다. “그리하여 시간은 무수한 목소리를 뒤집어쓴 채로 뒤집히고 뒤덮이고 있”(「발화 연습 문장-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다.
결국 과거의 ‘나’, 현재의 ‘나’, 미래의 ‘나’는 한 곳에서 만난다. 이때 우리는 흔히 각각의 ‘나’가 모두 동일한 존재, 혹은 동일하지 않더라도 연속적인 존재라고 여긴다. 그러나 시간이 선형적이지 않다고 한다면, 그 존재의 연속성과 동일성 또한 보장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 때문에 화자는 현재에서 시를 쓰지만, 단일한 시간 속의 존재가 아니다. 결국 이 시간 속에서 중첩되는 ‘나’ 사이의 만남을 중재하는 것이 중요한 화두가 된다. 즉 화자는 “과거의 이야기들이 미래에도 보이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우리에게 되돌아올 수 있는가”(「지금 우리가 언어로 말하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 묻는다. 여기서 물음이라는 방식은 『아마도 아프리카』에 등장하듯 ‘마침표’의 세계의 방식과는 구분되는 기제이다. 그에게 다시 새롭게 묻는 것은 곧 “묻혀 있는 것을 드러내는 방법”(「조그만 미소와 함께 우리는 모두 죽을 것이다」)이다. 이 방식을 통해 화자는 그동안 발견할 수 없었던 것들을 발견하고 느낄 수 없었던 것들을 생각한다. 예를 들어 “외부에서 내부로 걸어 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내부에서 외부로 옮겨 갈 수 있는 개인의 고유한 특성을 발견”(「네 자신을 걸어둔 곳이 너의 집이다」)한다거나, 한곳에 다양한 시간을 불러냄으로써 “목소리와 목소리 사이의 간극은 무감하던 날들을 반추”(「안개 속을 걸어가면 밤이 우리를 이끌었고」)하기도 한다. 그렇게 마주한 낯선 온기와 안부, 슬픔은 영영 도달할 수 없는 것일지라도 마주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쁜 것이 된다.
“무수한 과거 속에서 무수한 얼굴이 지나가고 있었다”(「한 자락」)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곧 ‘나’의 얼굴을 구성하는 수많은 ‘나’를 하나씩 기억하고 만나보는 일일 것이다. 그 가운데 깨닫고 마주하는 것은 곧 과거의 나이고, 지금의 나를 만든 나이고, 그 다음 어딘가로 흘러갈 나이다. “너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을 잊었고. 텅 비어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네 자신의 마음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다. (중략) 자신의 표정을 제대로 들여다보기 위해서 다른 누군가의 문장을 인용하는 무수한 얼굴을 생각했고. 그리하여 다시. 마주 보는 이중의 거울 속에서. 끝없이 끝없이 맺히며 펼쳐지는 거울상의. 그 어떤 예비된 묵시들처럼. 그리하여 다시. 꿈은 어디로부터 흘러와서 어디로 흘러가는가.”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 결코 단선적일 수 없는 ‘나’들을 들여다보고 만나는 일만큼 고통스럽지만 벅차는 일이 있을까. 그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 파노라마처럼 펼쳐낸 그의 시간들을 감히 내 것에 겹쳐보는 것은 그래서 참 알량한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