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했던 꿈을 나오기까지, 흑백에서 컬러로
1) 가끔 꿈에서 깨어날 때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겁 같은 참담함과 후회를 느끼게 되는 그 순간에, 딱 깨어나는 것이 그렇게 다행일 수 없기 때문이다.
2) 최근에 꾸었던 이런 종류의 꿈은 바다로 가는 것이었다. 바다 지하로 들어가 새 삶을 꾸리는 것이었는데, 모종의 이유로 지상에 나올 기회를 한 번 얻게 되었다. 그러나 지상에서도 종말 비슷한 상황이 오고 있어서 다시 바다로 돌아갈 지, 혹은 지상에 남을 지 선택해야 했다. 나는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친구들과 바다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많은 친구들이 지상에 남았다. 그리고 바다 밑 안전한 공간에서 다시는 지상으로 올라갈 수 없다는 말을 들었고, 순간 그 선택이 너무나도 후회되어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3) 다행히 꿈이었고, 깨어났다.
4) 왜 숨이 막혔던 걸까? 바다 밑에서 도태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순간 바보같은 선택을 했다는 후회가 물 밀 듯 들었다. 꿈이었는데도 그 막막함이 생생했다. 꿈에서 깨었을 때 (지상에 놓인) 내 방, 내 침대 위에서 아침을 맞고 일어난다는 사실이 다행이었다.
5) 그러나 현실이 그닥 다른 것 같지는 않았다. 최악과 차악 사이에서 선택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일 뿐만 아니라,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의 결과를 마주하는 것 또한 숙명인 것이 인간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6) 가끔 또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가장 살아있다고 느낄 땐 죽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할 때가 아닐까. 백 번 양보하여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내 인생이 너무나도 끔찍하고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역설적으로 살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살아있음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하는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의 끝남, 불완전함 등을 생각할 때이기 때문이다. 마치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는 말을 듣고 코끼리를 생각해 내는 것처럼 삶을 끝내고 싶을 때 더 삶을 많이 생각하게 된다. 살고 싶은가? 그것은 사실 그 다음 문제다.
7)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다미엘은 살고 싶어한다. 살고 있지 않은 천사라는 존재는 따라서 항상 살고 싶어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가 누군가에게는 위로로, 또 나와 같은 사람에게는 기만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삶을 생각하는 와중에, 살고 싶다는 욕망을 지니도록 강제하고 있기 때문에.
8) 삶을 생각하는 것은 대체 무얼까? 살고 싶다는 것과는 분명 다르다. 바다로 갈 지, 육지에 남아 모래 폭풍을 맞을 지 결정하는 고민은 삶을 생각하는 것이다. 다미엘이 동경하는 인간의 삶은 그런 지점에서 온다. 곡예를 하고 싶은데 계속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 누가 자신의 얼굴을 그려줬을 때 그것을 달라고 할 것인지 하는 고민, 그리고 마침내 높은 건물 위에서 떨어질까 말까 하는 고민. 고민의 마침표들은 저마다 다르다. 그 고민의 끝에 천사의 따뜻한 손길이 효과적으로 듣는다면 삶을 생각하는 문제는 살고 싶다는 문제로 귀결되지만, 삶을 생각하는 것의 본질적인 차원에 그대로 머무는 경우는 그렇지 않다. 영화에서 결국 건물 밑으로 떨어진 한 청년은 천사의 비명을 자아내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직후 화면은 색깔을 얻는다. (이 영화는 흑백으로 진행되는데, 컬러로 전환되는 순간들은 모두 인간적인 속성이나 욕망이 드러날 때 그렇다. 영화 후반에서 다미엘이 마침내 인간이 되었을 때 영화가 컬러로 그려지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9) 가끔이 아니라 아주 자주, 그리고 간헐적으로 아주 오랫동안 삶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싶다. 멈추어지지 않는 것이 통탄스럽다. 그러나 여전히 살고 싶다는 욕망을 갖는데, 그 이유는 무얼까 생각한다. 아마도 천사이지 않을까. 지하철에서 절망에 빠진 가장에게 내미는 천사의 손은 그로 하여금 절망에서 딛고 일어나게 해 준다. 기만이고, 부차적인 차원의 도움일 뿐이지만 바보 같은 인간은 본래의 질문을 망각한 채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머리 속을 대체한다. 천사의 손, 누군가의 손, 온기. 고립되어 있는 상황에서 느껴지는 온기. 살게 만드는 무언가. 망각하게 만드는 무언가.
10) 나는 내가 살고 싶다는 욕망을 내뱉는 것이 어색하다. 누군가와 순간을 공유하고, 그 순간에 그 다음 순간을 그리고 꿈꿔내는 것이 벅차면서도 고통스럽다. 나는 그 순간에 애써 삶을 생각하는 것을 멈추려 하지만 잘 멈춰지지 않는다. 살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그 다음 언젠가 또다시 외로워지는 순간에 나는 삶을 생각하고 마침내 그 끝을 자꾸 생각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바다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다시는 지상 위에 올라가 숨쉬지 못할 것이며, 다시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다시는 모래 폭풍을 견디는 순간을 마주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바다에 묻혀 안전하고 고요하게 죽을 것이다.
11) 다미엘이 마침내 사랑을 택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유년기의 노래>로 흘러가는 영화의 나레이션을 떠올려 보면 그가 '아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아이는 삶을 생각하지 않는다. 라캉에게 있어서 아이는 아직 상징계로 편입되지 않은 존재이다. 자기-동일시를 성공해 내는-다시 말해 마침내 아이를 벗어난-아이는 끊임없는 자기 소외를 겪는다. 소외되지 않은 채 존재하는 아이는 따라서 '나'와 '너', 삶과 세계를 생각하지 않는다.
12) 아이가 '아이'였을 때. 그러니까 다미엘은 '아이'이고, 이제 막 아이를 벗어나는 단계에 있으니 삶을 떠올리는 것의 고통과 슬픔을 어찌 알 수 있을까.
13) 기만으로써 작용하는 인간의 사랑은 그렇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해결책이 되어주는 살고 싶음의 욕망에 기인하는 인간의 감정들은 너무나도 가벼웁다. 그러나 안타깝지만 항상 속아넘어가는 것이 그 사랑일 것이다. 그리고 그 속아넘어가는 나약한 나의 인간적 모습에 구역질이 난다.
14)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꿈에서 깨어나는 것은 악몽일까 천만다행인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