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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리 Sep 25. 2022

이혼 희망타운

좋은 집이 아니라 내게 맞는 집

어느새 가을이다. 출퇴근길 쌀쌀해진 공기에서 시간이 지나가는 속도를 느낀다. 아무래도 이번 주말에는 두툼한 가을 옷 몇 개를 더 꺼내 놓아야 할 모양이다. 날씨에 맞추어 옷이 바뀌듯 이혼 후 내 삶도 많은 것이 달라졌다. 가족 구성원이 달라졌고, 집안의 총수입액이 달라졌으며, 사는 곳이 달라졌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과 관련하여 나를 누르는 책임감의 무게가 달라졌다. 아이들 아빠는 그다지 책임감 있는 가장이 아니었음에도 돈 쓰기를 좋아하는 만큼 버는 것도 제법 잘하던 사람이었다. 식구 넷 중에 잘 벌고 잘 쓰던 사람 하나가 사라지고 나니, 적게 벌고 적게 쓰는 사람과 벌진 못 하고 쓰기만 하는 아이 둘이 남았다. 경제적으로 보면 순전히 밑지는 장사다. 이혼을 하지 않고 아이들 아빠와 계속 살았다면 적어도 아이들을 데리고 살아갈 집 한  없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테고, 학원비를 줄여보겠다고 낡은 공부상 앞에 아이와 이마를 맞대고 앉아 실랑이 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혼은 행복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덜 불행하기 위해 하는 것이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불행의 무게추를 수도 없이 저울질한 끝에  선택이었기에 이혼이라는 결정 자체를 후회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다만, 인생의 굵직한 사건과 숙제들을 혼자서 풀어야 한다는 사실이 때론 많이 버겁고 힘들 뿐이다. 


내가 풀어야 할 숙제 가운데 가장 시급하고 중대한 것이 바로 내 집 마련이었다. 물론 내게는 이혼 전 살던 집을 팔아 나눈 돈이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그 돈으로 당장 계약할 수 있는 집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신중하고 싶었다. 도망치듯 선택한 결혼으로 나는 물론 나의 아이들까지 힘든 시간을 보냈다. 굳이 걱정할 이유는 없으나 아이들 아빠 역시 나로 인하여 힘들었을 것은 분명하다. 경험을 통해 섣부른 결정이 여러 사람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을 수 있음을 학습하였기에 다방면으로 고민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주거환경, 친정엄마, 출퇴근 거리, 분가시기, 가격을 두루 고려하기로 했다. 투자 가치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투자 수단으로써의 부동산이 아닌 집 본연의 기능과 가치에 집중하기로 한 것이다. 주거환경이 좋으면 투자 가치는 저절로 따라가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내가 바라는 주거환경이란  역세권, 대형마트 인접 이런 게 아니었다. 초등학생과 곧 초등학생이 될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그저 초/중/고를 걸어서 갈 수 있을 정도의 환경이면 충분했다. 친정과의 거리도 고려해야 할 요소였다. 우리가 떠나면 혼자 남겨질 엄마가 느낄 상실감을 알기에 물리적 심리적으로 친정과 멀지 않은 곳에 집을 구하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지금의 회사와 더 멀어지지 않아야 했고, 타 시도로 전보명령이 떨어질 것을 대비해 고속도로 진입이 수월한 위치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었다. 2년 반 뒤, 빵이가 초등학교 들어가는 해에 분가를 계획하고 있기에 현시점 기준으로 건축한 지 10년 이내의 집이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집을 찾기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집을 찾은 그다음은 돈이 문제였다. 내가 생각했던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집은 최소 5억 이상, 필수 요소 하나가 떨어져 나갈 때마다 7~8천 정도씩 집값도 낮아졌다. 조건과 타협하고 싶지도 않았고 무리한 대출을 내기도 싫었다. 집을 알아보는 과정에서 나의 경제력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한겨울 허허벌판에 촛불 하나 들고 서 있는 느낌이랄까? 본디 걱정 많은 인간이 현실의 벽 앞에 부딪히고 나니 잠이 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내가 고민하고 걱정하는 것에 비례해 세상살이가 편해지면 얼마나 좋을까만은 잠 못 자고 백날 고민해봐야 눈밑과 관자놀이만 푹푹 꺼져 갈 뿐 답은 없었다.


그렇게 잠 못 자는 밤이 이어지던 어느 날, 부동산 전망에 관한 뉴스를 찾아보다 우리 지역에 1만 5천 세대 정도의 대규모 택지개발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조만간 분양을 앞두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1만 5천 세대 택지개발이면 초/중/고는 당연히 생길 테고 당장은 아니더라도 편의시설도 제법 갖춰질 것 같았다. 지리적으로도 회사에서 멀지 않고 고속도로 진입도 용이한 위치였다. 물리적으로 친정집과 제법 떨어져 있긴 했지만 친정집과 같은 행정구역 안에 속해 있어 심리적 거리는 가까운 편이었다. 관심을 갖고 찾아보니  민간 분양, 공공 분양, 신혼 희망타운 공급 형태도 다양했다. 올해 청약을 앞둔 민간 분양은 국민 평수라 할 수 있는 32평대 이상, 공공 분양은 25평에서 30평 사이, 신혼 희망타운은 22평에서 25평 사이였다. 그런데 민간 분양은 이미 작년에 세대 대다수에 대해 사전 청약을 마친 상태라 본 청약 모집 세대수가 극히 적었고, 공공 분양은 문화재 발견으로 무산될 상황, 곧 청약을 앞둔 단지는 사실상 신혼 희망타운 하나뿐이었다. 


신혼부부 특별공급도 모자라 신혼 희망타운까지 만들면 나같이 어정쩡한 시기에 남편과 갈라서 뒤늦게 무주택자가 된 사람은 어쩌라는 건지 아무튼 이 사회는 결혼 및 출산 장려 후에 일어나는 일들에는 일절 관심이 없는 것 같다고 한참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다 대체 신혼 희망타운은 뭔가? 재혼 생각은 죽어도 없지만 재혼하면 그것도 신혼인가? 신혼의 기준이 대체 뭔가 싶어 LH 홈페이지에서 신혼 희망타운 지원자격을 살펴보기로 했다. 기본 자격에 혼인 예정이거나, 혼인한 지 7년 이내 혹은 만 6세 미만의 자녀가 있는 부부, 만 6세 이하 자녀를 둔 부 또는 모라고 적혀있었다.

빵이 나이가 만 4세를 조금 넘겼으니 나도 지원 자격은 갖추고 있는 것이었다. 소득 요건은 무난하게 통과, 친정엄마와 세대 분리가 되어 있는 상황이라 재산요건도 통과 가능할 것 같았다. 22평, 25평으로 좁은 편이었지만 분양가가 저렴하게만 나와준다면 도전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지금 4평 남짓한 방 한 칸에 셋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고 과거에 200평이나 되는 집에서도 살아본 사람으로서 집이란 게 가족 구성원 저마다에게 숨 쉴 공간제공할 수 있을 정도 굳이 크고 넓어야 할 이유는 없을 것 같았다.


신혼 희망타운 분양공고가 나오기만을 기다렸고 기다림 끝에, 공고가 나왔다. 그런데 생각보다 분양가가 높았다. 사전청약을 마친 민간 분양과 평당 가격이 거의 같았다. 1억 정도 대출을 내면 30평대 민간분양 아파트를 살 수 있는데 굳이 25평 신혼 희망타운을 사는 게 맞는 일인가? 불과 몇 년 전, '엘사(초등학생 사이에서 LH에 사는 아이들을 비하하는 말)'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것을 생각하면 대출을 내더라도 민간분양으로 돌아서는 게 맞는 것 같았다. 거기다 분양 예정인 민간 시공 아파트는 선호도가 높은 30평대이니 거래도 활발할 게 분명했다.


나는 한참을 고민했다.

이름난 브랜드의 30평대 아파트에 살면 나나 아이들이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상처받는 일은 없을 테지만 적은 월급으로 다달이 대출금을 갚아나가느라 허덕일 테고 아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물질적 혜택이 줄어들 것이 분명했다. 결국 나는 남들 시선 때문에 나와 아이들의 행복을 갉아먹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기로 했다. 좋은 집이 아니라 내게 맞는 집을 사기로 결정한 것이다. 신혼 희망타운의 분양가가 높게 나왔다곤 하지만 대출을 내지 않더라도 살 수 있는 금액 대였고, 계약금 10%만 내면 잔금은 입주 시에 완납하는 방식이라 잔금 치르기 전까지 가진 돈을 활용할 수도 있었다. 월급이 워낙 작아 가진 돈을 활용하지 않고서는 따로 돈을 모을 길이 없는 내 형편에 맞춤이었다. 집이 완공되는 게 빵이 초등학교 입학하는 해라 육아휴직을 낼 생각인데 휴직 시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 약간의 대출을 일으켜 여유자금을 마련한다 해도 부담이 없을 만큼 금리도 초저리(1.3% 고정금리)였다. 


청약을 넣고 떨림 반 체념 반의 마음으로 발표를 기다렸다. 무주택 기간이 짧아 청약 점수가 낮은 편이었고 내가 신청한 59T1 타입의 경쟁률이 1.7:1이라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크게 하지 않았다. 그런데 발표일 오후 4시 정확하게 문자가 왔다.

얼떨떨하고 어리둥절했다. 내 인생에 청약이라는 게 당첨되다니....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받지 못한 단지라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그래도 나의 삶에 약간의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투자 가치가 있건 없건 간에 내게는 아이들과 함께 살 집이 생겼고 덕분에 인생의 큰 숙제 하나를 해결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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