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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리 Sep 25. 2022

목욕 방랑자들

아들 둔 한부모 엄마의 걱정

올 초, 만 4세 이상 이성 자녀의 목욕탕 출입이 금지된다는 기사를 접했다. 아니, 나 같이 어린 남자아이를 둔 한부모 엄마는 어떻게 하란 말이지?

목욕문화가 많이 달라졌다 해도 아직 우리 친정 사람들은 탕에 들어앉아 뜨끈하게 몸도 풀고, 묵은 때도 벗겨내는 입욕 문화에 익숙했다. 아마도 욕조가 없는 화장실 겸 욕실 하나를 온 가족이 함께 쓰다 보니 샤워를 길게 할 형편이 못 돼 그러지 않았나 싶다. 문 밖에 볼일 볼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는데 콧노래 부르며 샤워시간을 즐길 여유가 어디 있겠나? 그냥 대충 땀만 흘려보내고 나오는 거지. 아무튼 유전적 요인 때문인지 환경적 요인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느 순간부터 목욕탕에 가 묵은 때를 벗겨내지 않으면 뭔가 찝찝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몸이 찌뿌둥하거나 아이들 몰골이 유난히 꾀죄죄해 보이는 날이면 다 같이 손을 잡고 목욕탕에 다. 목욕탕에 가면 아이들은 내 어릴 적 추억의 단지 우유를 빨대로 쪽쪽 빨아 마시며 소꿉놀이 같은 걸 했고 그동안 나는 뜨끈한 탕에 몸을 담그고 누워 잠깐의 휴식을 취했. 내가 열기로 인해 노곤해 몸을 이끌고 탕을 나올 때쯤엔 아이들도 누가 시킨 것 마냥 온탕 가장자리 한쪽을 차지하고 앉아 있었. 할머니들 사이에서 독보적 동안을 자랑하며 온탕에 나란히 앉은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아이들 뺨 위로 갛게 무르익은 딸기처럼 내 마음도 포근한 봄을 맞는 기분이었다. 물론 이다음부터는 묵은 때 벗기랴 아이들 씻기랴 시간이 총알같이 흘러가 아무것도 기억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지만 집에서 쫓기듯 하는 샤워에 비하면 황제들의 목욕에 다름없었다. 그런데 이제 그 노곤한 자유도 아이들 뺨 위에 빨갛게 잘 익은 딸기를 보는 재미도 끝이 나게 생긴 것이다.


이성 아동의 대중탕 출입이 금지된 후, 나는 대체할 방법을 찾아 가족탕에도 가고 모텔 대실 서비스를 이용해 보기도 했다. 코로나 여파 때문인지 가족탕은 예약하기가 너무 어려웠고 시설이 잘 갖춰진 곳은 비용이 서너 시간에 십만 원대로 부담스러웠다. 모텔 대실 서비스는 가성비가 좋긴 했지만 아이들을 데리고 목욕하러 가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불편했다. 모텔 입구에서는 사랑하러 온 남녀들을 마주칠까 봐 조심스러웠고 모텔방 안에서는 아이들이 모텔에 비치된 물품 중 일부의 쓰임에 대해 물어볼까 걱정스러웠다. 뭐 언젠가는 알게 될 것들이고, 아는 게 모르는 것보다 훨씬 나은 시기가 올 테지만 아홉 살, 다섯 살 먹은 아이들에게 벌써부터 그 물건들의 쓰임을 알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가족탕과 모텔 사이를 떠돌며 한 달을 보내던 나는 친한 과장님과 점심식사 자리에서 고민을 털어놨다.


"이제 부모가 성별이 다른 아이를 데리고 목욕탕을 못 간대요. 어린애를 놔두고 혼자 목욕을 갈 수도 없고 가족탕이랑 모텔이랑 여기저기 다녀봤는데 마땅치가 않더라고요. 가족탕 괜찮은 곳은 너무 비싸고...."

"차라리 호텔에 가서 하루 묵고 오면 어떠노? 주말마다 애들 데리고 놀러 가는 것 같더구먼. 1박 2일로 일정 잡아서 욕조 있는 호텔방에서 씻기고 그래 오면 되지."

"가족탕도 비싸서 부담스러운데 호텔은 못 가죠."

"아니야. 가족탕은 키즈룸처럼 그렇게 놀이기구 같은 거 갖춰놓고 한다고 비싸잖아. 3성급 호텔 이런 곳 찾아보면 하루 자고 오는 것도 그보다 쌀 거야."

"정말요?"

"응. 숙박 어플에 ○○호텔 쳐 봐. 시설 엄청 깔끔하제? 가격도 괜찮아."


찾아보니 항구 근처에 있는 그 호텔은 정말이지 시설도 깨끗하고 하루 숙박비는 놀이시설이 갖춰진 가족탕 대실료보다 저렴했다. 바닷가지만 휴양객이나 피서객들이 몰리는 해수욕장 근처가 아닌데다 문을 연지 얼마 되지 않아  특가로 손님을 끌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정도 가격이라면 아이들과 여행 삼아 한 달에 한 번 정도 항구 근처에서 놀다  묵은 때도 벗기고 하루 자고 나오기에 좋을 것 같았다. 내 씀씀이에 휴양지에 있는 5성급 호텔은 못 데려갈테고 목욕도 하고 아이들에게 호텔 구경도 시켜줄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물론 여기도 사랑하러 오는 남녀들을 마주칠 확률이 없는 것은 아니나 뭔가 사랑보다는 휴식에 초점이 맞춰진 곳 같아 부담이 덜 하기도 했다. 나는 그날 당장 창 끝으로 항구가 살짝 걸쳐진 객실을 예약 했다.


그리고 며칠 뒤 기대 반, 걱정 반으로 호텔 입구에 들어섰다. 좁지만 밝고 따뜻한 느낌의 로비에다 출입구를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안내데스크는 모텔이 주는 폐쇄적이고 은밀한 분위기와 확연히 달랐다. 거기에 직원의 환대까지 받고 나니 아이들에게 제법 괜찮은 엄마가 된 기분도 들었다. 간단한 체크인 절차를 거친 뒤, 든 것이라곤 목욕바구니와 옷가지 몇 개가 전부인 여행가방을 끌고 객실로 들어섰다. 창 밖으로 토막난 바다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욕조가 있는 욕실도 사진으로 본 것처럼 깨끗했다. 아이들 옷을 벗겨 얼른 욕실로 들여보냈다. 아이들은 목욕용품과 물놀이 장난감이 가득 담긴 목욕바구니를 욕조 옆에 놓고 거품 목욕을 하고 소꿉놀이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그러는 사이 나는 잠시 드러누워 창밖으로 보이는 한적한 바다 풍경을 즐겼다. 대중탕을 잃고 한참을 표류한 끝에 얻은 대체제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 만족감도 잠시, 침대가 너무 편안했던 탓일까? 호모사피엔스의 후손답게 내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나저나 캠핑장에 가면 이는 어떻게 씻겨야 하지?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개별 샤워실이 있는 곳이 있으려나? 그런 곳은 또 엄청 비싸겠지? 겨울엔 하루 정도 씻기지 않는다 쳐도 여름엔 어떡하지? 여름 캠핑은 못 가는 건가? 그럼 수영장은? 수영장도 못 데리고 가겠네...'


 번 시작된 생각은 끝간데 모르고 이어져 결국, 비상구 없는 법령이 점자블록이 끊어진 인도와 많이 닮았으며 우리 사회는 한부모와 장애인처럼 일반적 법령이나 제도에서 고려되지 못한 이들을 편의상 사회적 약자라는 이름으로 그룹화 한 것이란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자 창밖의 아름답던 풍경이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이기 시작했다. 더 누워있기가 불편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들이 벗어놓은 옷 가지를 정리하고 갈아입을 옷을 빼 놓은 뒤 씻을 채비를 하고 욕실에 들어섰다.


'과연 우리 목욕 방랑자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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