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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리 Sep 27. 2022

얼마면 돼? 얼마면 되겠어?

양육비 협상

아이들 손을 꼭 잡고 집을 나섰다. 정확하게 아침 열 시, 아이들 아빠 차가 저 멀리서 모습을 드러냈다. 전 부인과 아침부터 쓸데없는 통화를 하지 않으려고 시간을 딱 맞춰 온 모양이었다. 아이들 아빠가 이렇게 약속을 잘 지킬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 우리가 골목을 빠져나와 도로에 들어서는 것과 동시에 차가 우리 앞에 멈춰 섰다. 나는 꼭 잡았던 손을 슬며시 놓고 아이들 등을 살짝 밀었다. 아이들은 가볍고 탄성 좋은 스프링 마냥 아빠를 향해 튕겨 나갔다. 아이들 아빠도 자세를 낮춰 아이들을 안았다.

 

"아빠~~~!"

"아빠~~~!"

"어이쿠 똥이 빵이. 잘 있었어?"

"응. 당연히 잘 있었지. 근데 아빠 목걸이 생겼네. 엄청 멋지다."

 

아이들 눈높이에서 아빠 목에 둘러진 누런 금목걸이가 바로 보인 모양이었다. 아이들 아빠는 당황한 듯 아이들을 내려놓고 스무 돈은 족히 넘어 보이는 금목걸이를  티셔츠 안으로 감추듯 집어넣으며 말했다.


"멋져? 이거 할머니한테 선물 받은 거야."


누가 어디서 났냐고 물었나 이미 다 본 걸 감추긴 왜 감추나 완전히 도둑이 제 발 저린 꼴이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이혼 후 아이들 아빠는 외형적으로 하루가 다르게 멋있어지고 있었다. 180센티가 훌쩍 넘는 키에 풍성한 머리숱, 트러블 하나 없는 피부, 타고난 신체 조건도 한몫했지만 값비싼 브랜드의 옷, 신발을 갖추니 그야말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태가 좔좔 났다. 그가 늘 입버릇처럼 말하던 구두쇠 자린고비 마누라의 손을 벗어나 경제권을 갖게 되면서 자본주의가 주는 재미를 쏠쏠하게 즐기게 된 모양이었다. 그에 비해 이혼 후  꼴은 세월이 휘두른 방망이를 직격타로 맞고 있었다. 무릎 나온 트레이닝 바지와 낡은 티셔츠는 집에 있다 나온 때문이라 쳐도 생기를 잃어버린 낯빛과 푸석푸석한 머릿결, 움푹 파인 관자놀이와 눈밑은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슬금슬금 울화가 치밀었다. 내가 저 좋으라고 이혼했나? 난 내 티 쪼가리 한 장 사는 것도 벌벌 떠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돈 쓴 티가 팍팍 나는구먼. 한 달에 벌어들이는 돈이 내 월급의 2배는 족히 넘을 텐데 양육비 백만 원만 주고 저만 호의호식하니 좋은가? 애들 보기 미안하지도 않나? 허기사 애들 보기 미안하면 바람을 두 번이나 피웠겠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아이들 아빠와 나 사이의 문제에 아이들을 끌어들여 이상한 논리를 펴고 있는 것 같아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사실 아이 아빠는 부정기적으로 자기 시간 될 때만 아이들을 만나러 왔지만 올 때마다 양손 가득 아이들 선물이나 먹거리 같은 걸 챙겨줬다.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어린이날에는 아이들을 만나러 오진 않았지만 나를 통해 아이들 선물은 빼먹지 않고 챙겼다. 가끔 봐서 그런지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도 이혼 전보다 한결 여유롭고 따뜻해 보였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아이들 아빠 입장에서는 나라는 꼰대 사감이 사라지니 인생이 한결 부드러워진 것인지도 몰랐다. 생각이 이렇게 미치니 내가 질투할 사람이 없어 전남편을 질투하나 싶어 우스웠다. 그렇게 양육비에 대한 불만은 전남편에 대한 치졸한 질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나름의 결론을 맺었다.


그런데 바로 며칠 뒤, 양육비 고민에 다시 불씨를 집히는 일이 일어났다.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고 가성비 좋은 제품을 찾아보기 위해 반차를 내거나 유연근무를 활용해 마트에 다녔는데 한동안 꽤 바빠서 마트에 못 갔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즐겨 마시는 음료가 똑 떨어진 것이다. 곧 사놓을 테니 며칠만 참으라고 해도 되지만 오랜만에 아이들을 마트 구경도 시켜줄 겸 친정 엄마 바람도 쐬드릴 겸 온 가족이 손에 손을 잡고 마트에 갔다.  필요한 물품만 담아도 장바구니는 이미 20만 원 넘게 채워졌는데 아이들은 사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많았다. 돈도 돈이지만 뭐든지 조른다고 해서 다 가질 수 없다는 걸 알려주는  교육이라고 생각해서 아이들에게 본인이 먹고 싶은 음식 한 가지씩만 골라담으라고 일렀다. 똥이는 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통삼겹 구이를 골랐다. 내게 잠깐만을 외치고 사라진 빵이는 젤리 바구니와 냉동 치킨, 요구르트를 낑낑대며 들고 왔다. 빵이에게 세 가지를 다 선택할 수는 없다고 약속대로 가장 원하는 것만 카트에 담자고 말하려는데 옆에 있던 똥이가 나보다 빨리 입을 열었다.

 

"누나처럼 온 가족이 다 같이 먹을 수 있는 걸 골라야지. 너 할머니 치킨 안 먹는 거 몰라? 엄마랑 누나는 단거 싫어하잖아. 세 개 다 도로 갖다 놓고 누나랑 같이 고르러 가자."


요구르트와 치킨 봉지를 거머쥔 채 동생을 끌고 씩씩하게 사라지는 똥이를 보며 친정엄마는 애가 벌써 철이 들었다고 기특해하셨다. 하지만 똥이의 단호한 목소리와 그 당당한 뒷모습이 내게는 너무나 슬프고 아련하게 느껴졌다. 개성이 넘치다 못해 개인주의적 사고가 팽배한 세상에서 '나'보다 '우리'를 더 생각할 수밖에 없는 아홉 살짜리 심정은 어떠했을까? 옷을 살 때도 먹을 것을 살  때도 '두루'와 '널리'를 운운하던 엄마를 보며 어린 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늘 나누고 함께 하는 삶 속에서 이 아이는 엄마의 오롯한 사랑을 느껴본 적이나 있을까?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사에 효용성을 따지는 내 태도가 문제였고 근본적으로는 돈이 더 문제였다. 나는 태도를 고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아이들 아빠에게 양육비 인상에 대한 이야기도 조심스레 꺼내보기로 했다.


뒷날 아이들 아빠에게 문자를 보냈다.

똥이 아빠 시간 될 때 통화 좀 하자. 애들 양육비 관련해서 의논할 게 있어서

바로 전화가 왔다. 마트에서 있던 이야기를 해봐야 애들 먹고 싶은 거도 안 사주고 뭐하냐 구질구질하게 살지 마라 등등 온갖 잡소리를 들을게 뻔했기에 용건만 간단히 말했다. 물가가 너무 올랐다. 아이들 피아노 학원, 태권도 학원 원비도 올랐고 당신이 주는 양육비로는 학원비 보험료 내면 끝인데 애들 먹고 입히고 남들 비슷하게라도 살아보려니 내 월급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양육비를 조금만 올려줬으면 한다.


아이들 아빠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죽는소리를 시작했다. 입주 예정인 아파트 중도금 내는 것도 버겁고, 지금껏 시어머니 명의의 오피스텔에 무료로 살고 있었지만 월세를 주지 않으면 딴 곳에 세를 놓는다셔서 곧 월세도 내야 할 판이며 장거리 출퇴근을 해서 매달 나가는 기름 값도 엄청나다는 것이었다. 속으로 니 몸에 휘두르는 것 좀 줄이면 애들 양육비 몇 십만 원은 거뜬히 올려줄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다시 서로 물고 뜯는 개싸움이 시작될 것 같아 참았다. 대신 양육비 인상 소송이라는 게 있고 소송에 들어가면 수입에 비례한 양육비 청구가 가능해질 것이라는 협박 아닌 협박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며칠 뒤 아이들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양육비 말이야. 얼마면 돼? 얼마면 되겠노?"


저가 무슨 원빈도 아니고 새끼들 거둬 키우는데 드는 돈 가지고 얼마면 되냐니? 확 정말 시원하게 욕이라도 뱉어내고 싶었지만 양육비 한 푼 주지 않는 아빠들도 있는데 밀린 적 한번 없이 꼬박꼬박 보내준 그간의 정성을 봐서, 한 푼이라도 더 주겠다고 전화를 한 게 어디냐 싶어서 조용히 아이 한 명 당 10만 원씩이라도 올려달라 했다. 아이들 아빠는 그것도 아까웠는지 한참을 길길이 날 뛰었고 결국 나와 한바탕 물고 뜯는 개싸움을 벌인 뒤 다음 달부터 양육비를 10만 원 더 보내겠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분이 안 풀린 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고, 씩씩거리며 아이들 아빠와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친구는 진정하라고 그놈에게 한 푼이라도 더 받아 냈으니 네가 이긴 거라며 나를 다독였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이기고 지고의 문제를 떠나 아이들을 잘 먹이고 잘 입히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기껏해야 싸움질이라는 사실이, 그 싸움질 끝에 얻어낸 게 단돈 10만 원이라는 사실이 너무 싫었다. 그러나 싸우지 않기 위해 다시 상처 받지 않기 위해 감나무 밑에 누워서 감 떨어지길 기다리듯 잠자코 아이 아빠의 자비를 기다리는 건 더 싫었다.


도통 가라앉지 않는 내 거친 호흡도 경제적 무능도 다 마음에 들지 않는 그런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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