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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리 Sep 08. 2022

태풍이 오던 무렵

일 하는 한부모의 비애

 재난 문자에 이어 똥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모바일 알림장이 날아왔다. 태풍 힌남노의 영향으로 내일 방과 후 학교 운영이 중단되고 모레는 임시 휴교를 할 예정이란다.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다음날 출근을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 TV 앞에 앉아있는 아이들을 후다닥 몰아 잠자리에 들었다.

다섯 시 오십 분에 일어나 집을 나설 때 시간이 여섯 시 삼십 분, 회사에 도착한 시간이 일곱 시. 지역별 주간 시행 일정을 1장으로 정리하고 태풍 예상 경로에 인접한 지역은 빨간색 글씨로 강조한 다음 ‘○○시험 주간 일정 보고(태풍 힌남노 관련)’라는 제목을 달아 부장님 책상 위에 얹어 놓았다. 이로써 내 할 일 하나는 끝낸 것이라고 한 숨 돌리며 자리에 앉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가 걸려 왔다. 태풍으로 인한 일정 변경 문의, 태풍으로 인한 시험 중단 여부 문의, 태풍으로 인한 환불 문의, 문의, 문의 또 문의. 재난 상황에서 중대한 의사 결정을 필요로 하는  무늬만 문의인 전화 여러 통을 받고 나니 진이 빠질 대로 빠져 버렸다. 아직 정규 근무시간이 시작되기도 전인데 거기다 부장님, 국장님 급에서 결정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 나 따위가 뭐라고 혼자 끙끙 대고 있는 것인지..... 에라 모르겠다. 고민 그만하고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 와야겠다고  일어서 나가는 전화벨이 짧게 울리다 끊어졌다. 그리고 곧이어 내 휴대폰 화면에 찍힌 미지의 휴대전화 번호.... 이런 경우는 시험장에서 걸려 온 전화, 그것도 대단히 심각한 일이 일어났음을 알리는 전화가 대부분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날 한 부에 120명씩 총 4부를 시행 예정인 시험장에 정전이 됐단다. 컴퓨터로 치러지는 시험인데 정전이 되면 시험 자체가 불가하다. 시험장 책임자가 한국전력에 문의하니 변압기를 교체해야 하는데 단순한 작업이 아니라 복구까지 하루가 꼬박 걸릴 예정이라 했단다. 시험장 책임자의 정리되지 않은 목소리 너머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얼마나 정신이 없을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시험장 책임자는 내게 정전 상황에서 시험 시행이 가능한 몇 가지 방법을 물은 뒤, 공교롭게도 내가 답한 몇 가지 중 일손이 가장 많이 드는 방법을 골라 협조를 요청했다.


그 이후, 일어난 일들의 시간을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시험장의 정전 관련 요청 사항을 들어주는 것만도 벅찬데 태풍 관련 문의는 끝이 없이 쇄도하고, 이 와중에 곧 개최 예정인 시상식 보도자료를 작성하고, 태풍 관련 조치 사항을 담은 문서를 기안하고 그러는 사이 업무시간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시간이 어디로 왔다가 어디로 사라지는지도 모르게 지나 버리고 나의 영혼도 그 시간 따라 어디로 가 버리고 빈 껍데기만 남은 것 같았다.


하지만 영혼은 사라져도 의무는 남아 있는 법. 시험장으로부터 수험자들의 답안지를 전달받아 시스템에 입력하고 시험장 책임자에게 이상 여부를 확인받아야 했다. 사무실 창을 두드리는 빗줄기거세지고 바람이 조금씩 목소리를 키워가던 저녁 아홉 시 무렵, 최종 확인이 끝났다. 서둘러 컴퓨터를 끄고 책상 위에 있던 서류 뭉치를 서랍에 던져 넣는데 집에서 전화가 왔다.


"무슨 일이고? 와 안 오노?"

"사고가 좀 생겨서 그거 수습하느라요. 이제 갈 거예요. 끊어요."


얼른 자리를 털고 나가고 싶단 생각에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자세한 이야기를 할 여력도 없었다. 휴대전화를 챙기고, 가방을 들고 도망치듯 회사를 빠져나왔다. 제법 세차게 내리던 비가 잠시 그친 모양이었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밤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가 뱉었다. 한결 살 것 같았다. 숨이 좀 트이고 나니 휴대전화를 들여다 볼 정신이 생겼다.


구독 중인 유튜브 채널의 영상 업로드 알림, 수많은 이벤트 알림, 발신자가 다양한 문자와 카톡들 그 사이로 엄마가 보낸 문자 메시지.

비가 많이 온다.
오는 길에 태권도 들러서 애들 데리고 올래?

그제서야 집을 나서고 열 네 시간이 지나도록 아이들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아름드리나무를 통째로 뽑아버릴 만큼 강한 위력을 가진 태풍이 오고 있다는데, 방과 후 학교 운영이 중단되고 철도 운행이 멈추고 임시휴교를 한다는데, 아이들 귀가 걱정을 단 일 초도 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이 나를 소름 끼치도록 놀라다.


궁긍적으로 아이들과 잘 살아가기 위해 직장이라는 것을 다니고, 일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일에 치여 아이들을 새카맣게 잊어버린 아이러니. 생계를 위한 수단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버린 듯한 현실 속에서 기울어진 무게 중심을 어떻게 바로 세워야 할지...... 태풍을 기다리는 하늘도, 비 젖은 바닥도 온통 까매  경계를 가늠할 수 없는 밤길을 걸으며 내 삶도 이런 암흑 속에 길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지 생각했다.


그렇다면 더 늦기 전에 발길을 돌려야지. 지금이라도 아이들의 안부를 물으려고 집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똥이야?"

"응. 엄마 사고 났어? 어디 다친 데는 없어? 괜찮아?"

"응? 사고?"

"엄마 사고 났다며? 아까 할머니랑 통화하는 거 들었어. 안 다쳤어?"

"아.... 아니야. 회사에 일이 생겼단 뜻이야. 아 오늘...

"

"휴.... 난 또, 다행이다. 전화하고 싶었는데 할머니가 전화 못 하게 해서 걱정만 하고 있었잖아. 빨리 와. 끊을게."


내가 때 늦은 안부를 미처 묻기도 전에, 나의 안부를 묻고 수화기 너머로 사라진 딸아이. 나는 이기적이게도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이, 모자란 나를 받아주는 가족이 있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해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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