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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리 Dec 10. 2022

스킨십의 기억

아파하는 대신 지워버렸습니다.

영어 단어를 문장에 섞어 말하거나, 영어 문장을 읊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영어를 잘 못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멀쩡한 우리말 단어와 문장을 두고 왜 꼭 그래야만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그런데 가끔은 우리말로 범주화하기에는 어려운 특정 행동이나 현상, 감정 같은 것이 있다. 여러 전제를 담고 있으며, 드러난 사실이나 행위만으로 그 사용 여부를 판단할 수 없는 표현. 길고 세세하게 말하면 오히려 그 맛을 잃어버리는 무엇.


 대표적인 것이 스킨십이다. 굳이 우리말 표현으로 옮기자면 '피부의 상호 접촉에 의한 애정의 교류'가 맞을 듯한데, 느낌이 바로 오지 않는다. '춥다'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추위에 대한 경험이나 책에서 보았던 그림 같은 것들이 머릿속에 연상되고 느낌으로 바로 다가오는데, 스킨십을 우리말로 대체하면 전제를 하나하나 짚어가느라 연상작용이 느려지고, 온기 잃은 설렁탕처럼 말의 맛도 확연히 줄어든다.


나는 방금 스킨십이라는 단어를 쓰는 동안 살포시 잡은 손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모습, 그윽한 눈빛을 보내며 볼을 꼬집는 모습, 머리를 쓰다듬는 모습, 따뜻하게 안아주는 모습, 말없이 눈물을 닦아주는 모습, 입맞춤을 하는 모습을 떠 올렸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과 젊은 날 연애 상대들의 얼굴이 따라오고, 스킨십을 나누던 순간이 그림처럼 사진처럼 펼쳐졌다. 따스한 기분이 들었다. 체온을 재어보진 않았지만 0.1도 정도는 올랐 거다.


그런데 이상한 건, 스킨십이라는 단어를 따라온 그 숱한 얼굴 속에 전남편의 얼굴이 없다. 아니 이상하지 않다. 그는 내가 스킨십이라는 단어를 연상할 때마다 그 안에 줄곧 없었으니까..


칠 년 넘게 같이 살았고, 만남의 횟수가 적었다 해도 년은 교제 했으니 살을 섞어도 제일 많이 섞었을 테고 그 사이에서 아이도 둘이나 태어났는데 전남편은 내가 스킨십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따라온 남자들 틈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다. 일부러 지워버리려고 한 것도 아닌데 깔끔하게 없다. 생각해보니 충격이 너무 커서 자기 방어기제가 작용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와의 기억을 스킨십의 영역에 넣는 순간 나는 스킨십이라는 단어를 잃어버려야 했을 수도 있으니까..


이혼 일 년 전, 우리 가정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줄 알았던 그 시절의 어느 날 새벽이었다. 술을 진탕으로 마시고 온 남편이 관계를 요구했고, 나는 내키지 않았지만 응했다. 하지만 전남편은 술에 취한 탓인지 내 몸 위를 한참이나 소득 없이 뭉기적 대더니 대체 왜 이렇게 적극적이지 못하냐며 투덜댔다. 그리고 내게 더 이상 관계를 구걸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한 다음 고꾸라져 자버렸다. 이게 갑자기 무슨 멍멍이 소리인지? 만취해서 헛소리를 하는 것인지? 애 둘 엄마에 평범한 직업을 가진 중년 여자가 죽은 사람도 벌떡 일으킬 만한 대단한 섹스 테크닉이라도 구사해야 하는 건지? 하다 하다 별 거지 같은 소리를 다 한다며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후에 전남편이 그 시기 어떤 여성과 연애 중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날 일은 내게 큰 상처가 되었다. 성관계가 사랑을 나누는 행위가 아니라 테크닉 경연장이 되어버린 것, 전남편의 뭉기적 거리던 몸짓이 나를 그 경연장으로 불러들이려는 행위였다는 것,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끌려간 그 경연장에서 패배자가 되어버렸다는 사실 남녀 사이의 사랑과 접촉, 스킨십의 정의에 대해 내가 그간 맞추어 놓은 퍼즐을 일시에 흐트러뜨리기 충분했다.


그래서 나는, 나라는 사람은 스킨십이라는 단어를 따라오는 사람들의 무리 속에서 전남편을 삭제하는 것으로 심신의 안정을 찾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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