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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리 Dec 31. 2022

23년을 맞이하며

나를 조금 더 사랑하기

자리에 앉은 대리님이 내년 결심과 목표를 적을 거라며 카키색 가죽 표지가 멋들어진 다이어리를 수줍게 보여줬. 다이어리를 보니 연말 기분이 난다며 호응했지만 사비를 들여 새해 계획을 세울 다이어리를 구입한 대리님이 딴 세상 사람처럼 느껴졌다. 세상 일이란  계획해 봐야 내 뜻대로 이뤄질 수 없다는 걸 알아버린 나이 때문일 수도 감성보다 돈이 중요한 짠내 근성 때문일 수도 있는데 뭐가 됐건 나는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싫었다. 현실에 치여서 늘 똑같은 하루를 살아가는, 설렘도 바람도 없는 돈 버는 기계가 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 그게 싫었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에 지나지 않을 나의 묵은해와 새해 사이에 작은 점 하나를 찍어보기로 했다.


아이들이 잠들어 있는 아침 7시, 세수도 하지 않고 드립 커피 한 잔을 내려 집을 나섰다. 집 근처 등산로 입구에 차를 대고 산을 올랐다. 늘 아이들과 함께였던 산을 쉬지 않고 혼자 걷다 보니 그동안 소리 없이 먹어온 나이가 턱까지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마흔 하고도 하나 더 얹어진 나이가 실감 났다. 23년은 나의 건강을 위해 애써야겠다는 다짐이 저절로 들었다.

이른 시간 때문인지, 다들 내일을 위해 체력을 비축 중인지 몰라도 평소 사람들로 붐비던 산 정상이 휑하니 비어 있었다.  정상에 있는 돌탑을 배경으로 셀카도 찍어보고(셀카를 비롯한 얼굴 사진을 정말 한 동안 절대 찍지 않았는데 친구 한 명의 미친 명언 "앞으로 더 나아질 날이 없으니 그냥 찍어. 오늘이 그나마 젤 젊은 날이다."을 들은 이후로 꼴이 어떻든 막 찍기 시작했다.) 보온병에 담아 온 커피도 한 모금 한 뒤에 산을 내려왔다. 콧물은 찔찔 흐르고 다리는 조금 후들거렸지만 내려오는 내내 콧노래가 흘러나왔. 내 숨소리에 귀 기울이며 내 건강을 걱정하고 내 사진을 찍고 나를 위한 시간을 가지는 것, 이것만으로도 내가 굉장히 소중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나는 여세를 몰아 어려운 도전을 하기로 했다. 

산 아래 아이들과 함께 가던 국숫집, 아이들 챙겨 먹이느라 아이들이 흘린 국수가닥을 줍느라 코로 먹는지 입으로 먹는지도 모르게 들이마셨던 국수를 혼자 천천히 먹어보기로 한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붐비는 커피숍이나 식당에 혼자 가는 게 아직은 힘든 내가 언제고 풀어야 할 숙제이기도 했다. 국숫집을 향하는 발걸음에 나도 모르게 힘이 실렸다. 몇 달 전, 혼자 커피숍 기를 실패한 것과 달리 이번엔 성공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국숫집 앞에 도착했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문에 적힌 영업시작 시간이 10시, 문을 열려면 40분이나 남았다. 그냥 돌아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10시까지 차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래야만 오늘 찍은 점이 온전해질 것 같았다. 차에 앉아 언 손으로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며 40분을 보내다 딱 10시가 되어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주인아주머니는 후줄근한 차림의 여자가 개시 손님으로 들어선 게 마땅치 않은 듯 들어오라는 건지 가라는 건지 구분할 수 없는 태도로 나를 맞았다.


"혼자 세요? 아무 데나 앉으세요."


표정과 말투에 마음이 약간 상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혼자 식당에 들어가 주문을 하고 국수 한 그릇을 온전히 비우려는 지금의 시도 자체가 중요한 것이었다. 아주머니가 내가 앉은자리로 와서 성의 없는 주문을 받아가고, 다른 손님이 몇 명 들어오고, 그러고도 한참 뒤에야 국수 한 그릇이 내 앞에 놓였다.

디포리를 푹 끓여 만든 따뜻하고 진한 육수에 산 봉우리처럼 수북이 쌓아 올린 면 사리를 보니 얼었던 몸과 상했던 기분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제일 먼저 숟가락을 들어 진한 국물을 입에 한 술 떠 넣었다. 의식을 치르듯 젓가락을 들고 면으로 만든 봉우리를 깎아내린 다음 뭉쳐진 면발들을 조심스레 풀어헤쳤다. 그리고 한 젓가락 집어 올려 입에 넣었다. 입 안에서 가닥가닥 끊어지는 면발처럼 그간 나를 옭아매던 보이지 않는 사슬이 끊어져 나가는 같았다.

국수 한 그릇을 다 비우고 가게를 나오는데 2023년은 아무래도 나를 더 사랑하는 한 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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