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부리 Jun 02. 2022

힘내세요(1)

그날의 기억

5월은 어린이들의 명절, 어린이날이 있는 달이다.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많은 아이들을 한부모 엄마에겐 힘든 달이다. 아이들에게 특별한 추억이 될 만한 장소를 찾는 것부터 시작해, 아이들이 평소 갖고 싶어 하던 물건의 목록을 떠올리며 선물을 정하고 아이들과 놀아주기까지 그 모든 것을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하다 보니 정신적, 육체적 소모가 많다. 적당히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되는데 나란 사람은 우리네 어머님들 명절 음식이 그러하듯 '적당히'가 어렵다 보니 항상 문제가 터진다.


이번 어린이날도 마찬가지였다.

어린이날 전 주에 소규모 놀이공원에 다녀온 것을 시작으로 대형 할인마트에서의 선물 구매, 만화영화 관람, 슬라임 카페 방문, 캠핑으로 끝나는 2주간의 일정을 세웠다. 놀이공원 나들이가 만족스럽게 끝나다 보니 그다음 일정도 술술 풀릴 거라 생각했는데 선물을 사는 것부터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트와 장난감 가게를 몇 곳이나 돌아다녔지만 끝내 아무것도 고르지 않은 딸아이는 묵언수행으로 자신의 심기가 편치 않음을 드러냈다. 집에 돌아와서도 먹고 싶은 게 없냐는 나의 물음에는 물론, 같이 놀자고 조르는 동생의 부탁에도 무표정 무응답으로 일관했다. 아홉 살, 장난감도 인형도 좋긴 하지만 뭔가 자기 나이엔 걸맞지 않다는 걸 살짝 알아가는 단계, 그 과도기적 단계에서 결국 아무것도 고르지 못한 아이의 불편한 심정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것 같았다. 하지만 개인의 감정을 지나치게 표출해 주변에까지 영향을 주는 태도는 고쳐야 할 부분이었고 나중에 꼭 한번은 짚고 넘어가리라 마음먹으며 올라오는 화를 눌러 앉혔다.


불편한 하루가 지나맞은 어린이날의 아침.

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화영화를 예매하고, 차가 막힐 것을 대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영화 시작 전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지하에 있는 서점에 가서 책 구경도 하고 시간을 보내려 했는데 서점엔 책만 있는 게 아니었다. 문구류, 간식, 뽑기 자판기까지 아이들의 흥미를 자극하는 것들로 가득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들은 뽑기 자판기가 있는 곳으로 곧장 달려갔다. 평소 같았으면 절대 안 된다고 선을 그었겠지만 어린이날이니 기분 좋게 허락해 주기로 마음먹고 아이들 손에 500원짜리 동전 10개씩을 건넸다. 둘째가 동전 투입구에 500원 네 개를 넣고, 손잡이를 돌리고, 돌리고, 돌리자 곤충모형이 들어있는 동그란 캡슐이 나왔다. 뭐가 그리 좋은지 돌고래 함성이 터져 나오고 두 다리가 춤을 다. 거기서 끝났으면 참 좋았을 것을... 눌려 있던 욕구가 일시에 폭발한 것일까? 둘째는 그곳에 있는 뽑기 기계들을 다 털어먹을 기세로 '또! 또! 또!'를 외쳤다. 떼를 쓰기 시작하니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누나의 남은 동전까지 가져와 쓰고도 모자라 1만 원을 더 뽑기 자판기에 넣은 뒤에야 영화 시간을 핑계로 간신히 뽑기 기계 앞을 벗어날 수 있었다. 영화 상영 중 둘째가 팝콘을 더 달라고 잠깐 소리친 것만 빼면 영화 관람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어린이 영화는 말소리도 들리고, 더러 우는 소리도 나고..... 그걸 용인할 수 있는 사람들이 보러 오는 거니까.


영화가 끝나고 아이들이 그토록 가고 싶어하던 슬라임 카페로 향했. 주택을 개조해 만든 슬라임 카페 곳곳은 이미 대기하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한 시간 반 넘게  기다려야 입장 가능하다는 안내를 받았지만 아이들은 포기할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하는 수 없이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슬라임카페 마당에 줄을 섰다. 대기자들이 뙤약볕을 피할 수 있게끔 차양이 설치 돼 있었지만 이른 더위에 야외에서 한 시간 넘게 대기하기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삼십 분쯤 지났을까 배고픔과 더위에 지쳐 다시 묵언 수행에 들어간 첫째와 슬라임 카페 안팎을 쉴 새 없이 돌아다니는 둘째를 보고 있자니 더 이상 기다리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점심부터 먹고 오자며 아이들을 데리고 슬라임 카페를 나왔다. 아이들은 시원한 밀면이 먹고 싶다고 했다. 아이들이 말하는 밀면 전문점까지는 걸어서 갈 수 없는 거리였다. 힘들게 주차 해 놓은 차를 빼서 아이들을 태우고밀면 전문점까지 갔다. 그런데 여기도 대기....! 테이블 회전율이 좋아 대기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슬라임 카페 앞에서 진을 빼고 온 탓인지 이미 넋이 반쯤은 빠져나가고 없었다. 어찌어찌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슬라임 카페에서 전화가 왔다.


"부리님! 슬라임 카페입니다. 대기자 명단에 두 줄이 그여 있던데 대기 취소하신 것 맞나요?"

"네, 애들이 배가 고파 밥 먹으러 온다고요."

"네, 그럼 취소하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아, 잠시만요! 죄송한데 혹시 지금 다시 가면 대기 시간이 얼마나 될까요?"

"지금 만석이긴 한데, 대기자가 없으셔서요. 30분 안에 오시면 바로 입장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아, 넵! 그럼 저희 다시 가도 될까요?"

"네, 그러시면 대기자 명단에 다시 올려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넋은 이미 반쯤 나간 뒤였지만, 배를 채우고 나니 전쟁터에 다시 뛰어들 용기가 생겼다. 무엇보다 슬라임 카페 가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아이들 얼굴이 떠올라 이대로 어린이날의 일정을 끝낼 수 없었다. 점심때가 지난 슬라임 카페는 빈자리가 있었다. 점원의 안내에 따라 자리를 잡고 카운터로 갔다.


"먼저, 슬라임 베이스를 정하시고요. 순서대로 슬라임을 만드시고 다 만드시면 색소는 무료로 넣으실 수 있어요."

"네. 가 슬라임 카페 처음이라 슬라임 베이스 설명 부탁드려도 될까요?"

"클리어, 버터, 워터...... 클리어는 가장 기본이고 말 그대로 투명....."

"엄마! 나 이거 할래. 이것도! 이것도!"

"어. 어. 잠시만. 설명해주시는 것 듣고."

"엄마! 난 이거!"

설명 따위 뭐가 필요하냐고 따지기라도 하듯 쉴 새 없이 치고 들어오는 녀석들 탓에 대화는 단순해졌다.

"죄송한데, 아이들 쉽게 할 수 있는 베이스로 두 가지 해주세요."

"네. 토핑은 하실 건가요?"

"엄마! 토핑~! 토핑~!"

"네. 애들 각자 한 통씩 할게요."

"이 통에 원하시는 토핑을 담아오시면 돼요. 통 하나당 4천 원이고요. 한 통 해보시고 모자라시면 더 하셔도 돼요. 통은 토핑 진열대 옆에도 있거든요. 진열대는 저쪽으로....."

직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둘째가 직원이 내민 조그만 일회용 소스 용기 같은 걸 들고 각종 토핑이 진열된 곳으로 달려갔다. 급하게 계산을 마치고 토핑 진열대로 들어서니, 언제 왔는지 첫째와 둘째가 토핑대 앞에 나란히 서 있었다. 감탄과 함성을 내뱉으며 예쁜 쓰레기들을 소중하게 주워 담고 있는 녀석들을 보자니 30여 년 전, 플라스틱 반지를 보석이라 여기며 애지중지하던 내 어린 시절이 떠 올라 잠깐 웃음이 나기도 했다.


토핑을 고른 뒤, 카운터에 준비된 슬라임 베이스를 챙겨 자리에 앉았다. 피곤과 갈증이 동시에 밀려 올라왔다. 방전 직전에 급속으로 에너지를 보충한 중년이, 보석 에너지 파워로 무장한 아이들의 기운을 따라가기엔 역부족이었다. 시원한 음료를 하나 시켜 마셨다. 당분 때문인지, 시원한 기운 때문인지 각성이 되는 듯했다. 그러나 신나게 슬라임 재료를 휘젓고, 조무르고, 늘리고, 뭉치던 아이들은 음료가 채 바닥을 보이기도 전에 흥미를 잃어갔다. 아이들에게는 또 다른 놀거리가 필요했다. 이런 것을 예상이나 한 것일까? 슬라임 카페 한 켠에는 필통 꾸미기와 휴대폰 케이스 꾸미 코너가 마련돼 있었다. 핸드폰도 없는 첫째가 핸드폰 케이스를 만들겠다고 고집을 피우기 시작했다.

"핸드폰이 없는데 핸드폰 케이스를 만들면 어떡해? 딴 것 만들자."

"핸드폰 나중에 사 줄 거잖아."

"나중에 핸드폰이 생기기야 하겠지만 어떤 핸드폰을 사게 될 거라고 지금 만들어? 대신 학교에 가지고 다닐 수 있는 필통 꾸미기 하자."

"................"

"엄마가 아무것도 안된다는 게 아니잖아. 필통 꾸미기 하고 휴대폰 케이스 꾸미기는 휴대폰 생기면 하자."

나의 설득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첫째는 핸드폰 케이스 만들기 코너 앞에서 바닥에 발을 묻고 다시 묵언수행에 들어갔다. 윽박질러 해결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가만히 서서 첫째와 신경전을 이어갈 뿐이었다. 그때 둘째가 토핑이 가득 채워진 통 4개를 들고 나타났다.

"엄마. 우리 이거 하자. 나 또 갖고 올게."

정말이지 오 마이 갓! 맙소사!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그때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폭포수가 쏟아지듯 일순간 아랫도리를 흠뻑 적시는 느낌....

부정출혈이었다. 2년 전, 한 번 경험해 본 일이 있었기에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게도 남편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