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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리 Oct 19. 2022

편의점과 놀이터(상)

너로 인하여 나는 다시

오랜만에 아무 일정도 없는 일요일이다. 자꾸만 나가자는 아이들 성화에 못 이겨 집을 나섰다. 골목길을 벗어나 농수로 옆으로 이어진 작은 길을 따라 걸었다. 가볍고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잘 익은 벼들은 바람이 불 때마다 사그락사그락 몸을 부딪혔다. 길 가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워다 벼이삭을 가볍게 훑었다. 놀란 메뚜기들이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을 향해 후드득 솟아올랐다. 가을이 정점을 향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누런 벼의 물결도 그 위 파란 하늘도 수분이 적당히 빠진 바람도 다 좋았다. 더 걷고 싶어졌다. 


"우리 조금 더 걷다가 갈까?"

"응. 그래. 그럼 저기 차 있는 길로 돌아서 가자."

"좋아. 좋아. 누나 말 대로 하자."


논길을 따라 걷고 싶었지만 두 녀석 다 이미 길 건너 편의점에 마음을 뺏긴 것 같은 모양이었다. 하는 수 없이 아이들 손을 잡고 농로 끝에서 차로 쪽으로 이어진 작은 다리를 건넜다. 2차선 도로 옆으로 좁게 난 인도를 따라 걷다 보니 공사 중이던 커피숍이 어느덧 뽀얗 단장을 마친 게 보였다. 노인회관 출입문이 바뀌고, 전에 살던 집 대문도 색이 달라진 듯했다. 시간은 소리 없이 잘도 흐르고 사람들은 그 안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그림을 그려내고 있었다. 


내 삶도 드러나게 또 드러나지 않게 많은 것이 달라졌다. 나무의 나이테처럼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나타난 몸의 변화 말고도 마음의 지형에 큰 변화가 있었다. 한 차례 지진 이후 언제부터인가 가슴에 깊고 넓은 웅덩이 만들어진 것이다. 처음엔 슬픔, 절망, 울분 같은 것으로 채워진 작은 흙탕이었는데 어느새 물이 차오르고 용서, 감사, 사랑 등 다채로운 감정들이 서로 어울려 유영할 수 있을 만큼의 깊이와 넓이를 갖게 되었다.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서야 자신을 돌아보고 새롭게 거듭날 수 있었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나는 이혼을 통해 나와 나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기 시작했고 그로 인하여 많은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틀렸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나와 다른 것임을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더 이상 아프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더 흐르자 그 사람과 나 사이에 온전한 가해자도 온전한 피해자도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비단 그 사람과 나의 관계에서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이 나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사람들로부터 상처받는 일이 줄었다. 상처받는 일이 줄어들자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지니고 있던 수많은 가시들이 퇴화하기 시작했다. 삐죽삐죽 가시 투성이던 내가 비로소 조금 사람다운 마음가짐을 갖게 된 것이다. 이게 모두 지난한 결혼 생활과 지옥 같은 이혼의 과정 덕분이라니 우습기도 지만 사실이었다. 


내 머리가 변화의 흔적을 더듬어 원인에 닿는 동안 발길은 어느새 편의점 앞에 도착해 있었다.


"엄마! 우리 편의점 가자."

"응? 엄마 돈 안 가지고 왔어."

"짜잔~! 내가 쏠 게! 지갑 가지고 왔지롱."

"엄마랑 같이 있을 땐 네 돈 쓰는 거 아니야. 나중에 다시 와."


결국 내가 지고 말 거라는 걸 알았지만 돈 쓰는 걸 쉬이 여기도록 놔두고 싶지 않아 안 된다고 했다.


"아잉~! 한 번만!"

"엄마~! 누나가 쏜대잖아. 한 번 쏘게 해 줘라. 아잉~!"

똥이에 이어 빵이까지 내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붕어 주둥이처럼 나온 귀여운 입술들이 가슴을 쪼아대 더 이상 저항할 수가 없었다. 지갑을 챙겨 온 똥이가 당당하게 편의점 문을 열고 빵이와 내가 뒤를 따랐다.


"빵아! 누나 여기서 음료수 고르고 있을 테니까 먹고 싶은 거 한 개만 골라와. 장난감은 안 된다."

"예썰~!"


뺀질뺀질하던 빵이 녀석이 누나를 향해 거수경례까지 하는 걸 보니 꼬맹이들에게도 어김없이 미치는 자본주의의 영향이 놀라웠다.


"엄마, 엄마도 먹고 싶은 거 골라."

"엄마는 먹고 싶은 게 없어. 너희들만 골라."

"나 돈 있어. 엄마도 꼭 사."

"알았어. 골라 볼 게."


어린애 코 묻은 돈을 빼먹기 싫어서가 아니었다. 먹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점점 줄어드는 그런 나이가 된 것이다. 도무지 새로울 게 없는 그런 심드렁한 나이. 하지만 아직 어린 똥이는 아무 감흥 없는 마흔이라는 나이에 대해 알지 못할 것이다. 나는 똥이의 배려에 부응하기 위해 편의점 카운터 근처 냉장식품 코너를 서성이며 무엇을 고르는 척했다. 잠시 후 똥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빵아! 다 골랐어?"

"응. 누나 나 이거 사도 돼? 포켓몬 스티커가 들었대."


빵이가 우산 모양의 플라스틱 용기에 별사탕과 포켓몬 스티커가 들어있는, 장난감과 먹거리 그 경계에 있는 상품을 똥이 앞으로 내밀었다.


"응. 그래. 잘했네."

"엄마! 가자! 빵이 골랐대. 나도 골랐어."


역시 잠깐 뭉그적 거리면 되는 거였다고 생각하며 계산대 앞으로 갔다. 계산대 위에는 빵이가 고른 상품 외에도 단지 우유 하나, 탄산수 한 병이 놓여 있었다. 내가 결국 아무것도 고르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똥이가 내 것까지 골라온 것이었다. 이 녀석의 촉이란 어찌 이리 탁월한지....

지갑에 있는 돈을 꺼내 척척 계산을 마치고 내 전화번호로 현금영수증 등록까지 완벽하게 끝낸 똥이는 내게 탄산수 병을 툭 하고 안겼다.


"자! 이거 엄마 꺼! 나가서 바로 마셔."

"어. 그래. 고마워."


똥이 말대로 편의점 문을 나서자마자 탄산수 병마개를 열고 한 모금 시원하게 들이마셨다.


"키~야! 좋다."

"어때? 좋지. 내 말 듣기 잘했지? 그때 놀이터도 내 말 듣고 갔다 와서 엄마 좋아졌잖아."

"놀이터?"

"왜 그때 있잖아. 엄마 막 울고 하던 날 내가 엄마 바람 좀 쐬고 오면 나을 거라고 놀이터 데리고 갔잖아. 그때도 엄마가 갔다 와서 내 말 듣기 잘했다고 그랬잖아. 기억 안 나?"


순간 할 말을 잃은 나는 하마터면 정신까지 잃을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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