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부리 May 25. 2022

엄빠라는 이름의 나_1

다시 찾아온 봄

"엄빠~! 우리 산책 가요."

"엄빠~! 나도 갈래요~!"

아이들은 가끔 나를 '엄빠'라고 부른다. 엄마이자 아빠라는 뜻이다. 한부모 엄마의 무게가 느껴지는 말 같기도 하고, 엄마이자 아빠로서의 역할을 잘 해내고 있다는 칭찬 같기도 해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말이다. 이 말만 들으면 없던 힘도 불끈 솟아오른다. 아이들을 번쩍 안아 올릴 수도 있고 커다란 그늘막과 텐트를 뚝딱 칠 수도 있다.


이년 전, 이혼의 기로에서 나의 발길을 수 십 번 잡아끌던 것이 '아빠'라는 존재였다. 내게 남편이 없는 것이 낫다고 해서 아이들에게 '아빠'가 없는 것이 낫다고 할 수 있는가? 집에 오면 스마트폰만 본다고 해서, 아이들에게 화를 잘 낸다고 해서 '아빠'는 없어도 되는 것일까?


답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남편의 지속되는 외도와 언어폭력을 참아낼 수 없었기에 나는 결국 이혼을 택했다. 어렵게 내린 결정이라 이혼 선언과 함께 모든 것이 일사불란하게 정리될 줄만 알았는데 지옥 같은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5개월 남짓, 진흙탕 싸움 같은 재산분할과 양육비 다툼을 벌인 후에야 7년 간의 결혼 생활이 온전히 끝났다.


이제 남은 일은 씩씩하게 잘 살아가는 것 밖에 없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데 그때 첫째 아이의 망가진 손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 아빠와 내가 긴 다툼을 이어가는 동안, 큰 아이는 손톱 주변의 살갗을 한 겹 한 겹 벗겨내며 두려움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고름이 맺히기도 하고 더러는 피딱지가 앉기도 한 그 작은 손을 본 날, 아이를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뒤 부장님을 찾아갔다. 아이의 상태를 말씀드리고 휴직에 대한 양해를 구했다. 부장님은 생계를 걱정해주셨지만, 그 시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이었다. 지치고 상처받은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다. 나를 위해, 아이들을 위해....


휴직은 빠르게 접수되었고 얼마지 않아 아이들과 오롯이 함께하는 삶이 시작됐다. 조그만 손을 양쪽에 하나씩 부여잡고 학교로 유치원으로 아이들을 보내고 나면, 집을 정리하고, 육아 전문 서적을 찾아 읽고, 아이들 먹을거리를 준비했다. 그런 뒤에는 아이들과 함께할 놀이를 구상하고, 체험 프로그램을 예약하고, 나들이 장소를 검색하며 아이들을 위한 나만의 일정표를 만들었다. 새롭고 긍정적인 자극을 통해 아이들이 불안감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휴직기 주머니가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다양한 경험을 계획했다. 나의 일정표는 한 달 수강료가 만원도 되지 않는 과학마술수업, 팔천 원짜리 쿠킹 클래스, 칠천 원으로 가능한 옹기 만들기 체험, 오천 원으로 예약 가능한 피크닉장에서의 소풍, 이천 원으로 가능한 동물원 나들이, 무료 인형극 관람, 어린이 박물관 구경, 도서관 나들이, 어린이 소방안전체험, 등산 등 소소하지만 다양한 행사들로 채워졌다.


계획된 일정이 없을 때도 집 주변, 논으로 밭으로 개울로 쉬지 않고 돌아다녔다. 어떤 날은 농수로 한쪽에 놓인 도롱뇽 알을 찾아내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논두렁에 앉아 풍년 새우를 세며 풍년을 점쳐 보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개울로 내려가 돌 밑에 숨어있는 얼룩동사리도 찾아내며 그렇게 갖가지 생명들이 만들어낸 농촌의 르네상스를 즐겼다.


문 밖에 개구리가 시끄럽게 울어대는 그 봄이 다시 찾아온 지금, 퇴근한 나를 붙잡고 산책 가자 조르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자기 키가 훌쩍 는 잠자리채를 어깨에 하나씩 걸쳐 메고 당당하게 집을 나서던 지난봄의 기억이 새삼 머릿속에 떠오른다. 새롭고 긍정적인 자극을 통해 아이들의 불안을 해소시키려는 나의 계획이 들어맞은 것인지, 우리가 만났던 그 많은 생명들이 우리에게 힘을 준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 봄, 행복했던 기억이 지금의 우리를 지탱해주는 힘이 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의 기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