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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리 May 23. 2022

사랑의 기억

외로움 때문은 아니다

"엄마, 엄마 있지......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엄만 건 알겠는데, 엄마가 나를 엄청 사랑하는지는 잘 모르겠더라."


쿵 하고 심장을 쥐어박는 말이었다. 시선을 살짝 올려 룸미러에 비친 딸아이의 표정을 살폈다.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덤덤한 얼굴, 아침부터 대화를 무겁게 끌고 나갈 생각이 아니라면 원인 규명을 하겠다는 욕구는 접어두고 모범 답안을 말하는 지혜를 발휘할 필요가 있었다. 


"어머, 어쩌지? 엄마가 엄청 사랑하는 걸 모르겠다니, 엄마가 티를 더 팍팍 내야겠네. 오늘 하루도 즐겁게 지내고, 이따가 집에서 보자. 사랑해."


아이는 만족한 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차에서 내렸다. 그냥 갑자기 사랑을 확인받고 싶었던 것일까? 엊저녁 유난히 보채던 동생을 안아 재우느라 눈길 한번 제대로 주지 못 하고 잠들게 한 일이 마음에 걸렸다. 미안한 마음에 아이가 교문 안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지켜보다가 차를 돌렸다.


오디오 볼륨을 키우자 임 가수의 신곡이 출근길, 차 안을 가득 채웠다.

둘이 함께 했던 순간순간이
시린 폭포처럼 쏟아지는 날 그 언젠가
우리 만날 수 있을까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한 사람의 얼굴이, 온기와 향기까지 고스란히 살아났다. 아무래도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전해 들은 어떤 남녀의 안타까운 조우가 긴 시간 봉인되어 있던 그에 대한 기억을 불러내 온 모양이었다.



어느 날, 혼자 늦은 점심을 먹게 된 지인이 골목 끝자락에 있는 한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노포는 아니었지만 세월의 흔적이 어느 정도 베인 가게는 점심때가 지났는데도 손님들로 붐볐다. 서넛 이상 모여 온 사람들 틈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기 멋쩍었던 지인은 카운터 옆 조용한 자리에 앉아 가마솥밥 정식을 주문을 했다. 혼자 조용히 앉아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데 주방 소음, 사람들의 웅성거림 사이에서 떨리는 음성이 선명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카운터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선 두 남녀의 대화.

"ㅇㅇ 아니니? 너를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이야."

"ㅇㅇ오빠...?"

"네가 식당 사장이 돼 있을 거란 생각은 전혀 못 했는데, 시간이 많이 흐른 게 맞나 보구나."

".... 지냈어요?"

"응.... 그냥 그렇게 지냈지.  결혼을 했겠구나."

"네. 오빠는....?"

"아.. 난 아직."

"........."

"너무 불쌍하게는 여기지 마라. 난 괜찮으니. 마지막으로 악수나 한번 할 수 있겠니?"

"네." 

짧은 시간이었지만 여자를 향하던 남자의 눈빛이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남자가 가게를 떠나고 곧 지인의 앞에 가마솥밥 한상이 차려졌다. 지인의 마음 속에 두 남녀의 재회 장면이 주는 여운이 가마솥밥의 김처럼 한참을 가시지 않고 머물렀.


하지만 뭐, 인생이란 그렇게 뜻하지 않는 장소에서 뜻밖의 장면을 만들기도 하는 법. 4년 가까운 시간 동안, 뜨겁게 사랑했던 그와 내가 마지막으로 만난 곳은 우리 똥이 임신을 확인받으러 방문한 산부인과였다. 그의 옆에는 산모 수첩을 든 여인이, 내 옆에는 이제는 말 그대로 남이 되어버린 남편이 서 있었다. 그와 내가 서로를 애써 외면하고 돌아선 그날 이후, 나는 십 년 가까운 시간을 아무렇지 않게 지내 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지난 사랑의 기억이 어제 일인 양 빠르게 소환되다니... 외로움 때문일까?겁이 다. 이혼녀가 되고 나니 새삼 그 사람을 기억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가족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았다. 


허나 이내 알 수 있었다. 씻어버리려 해도 씻기지 않는 기억, 반짝반짝 아름다운 시절에 대한 기억, 그것이 그리움이나 후회와 다른 것임을, 랑의 기억을 소환한 것은 나의 외로움이 아니었음을 말이다. 사랑의 기억은 자존감이란 형태로 내 안에 오래 전부터 머물러 있었다. 나는 여자로서 감당하기 어려웠던 남편의 모욕적 발언들, 나이와 동떨어진 회사 내의 직급, 이혼녀를 둘러싼 편견들을 사랑받아 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자기 긍정으로 이겨내왔다. 어느 남녀의 안타까운 사연이, 임 가수의 노래가, 살아난 싸이월드 사진첩이 변환장치가 되었을 뿐 그 사랑은 언제나 내 안에 있었던 것이다.


아홉 살 꼬마숙녀를 미소 짓게 하고

굴곡 많은 마흔 살 여인의 삶을 지탱해 주기도 하는 사랑

내게 잊지 못할 사랑의 기억을 심어준 그를 다시금 조우하게 된다면, 자연스러운 눈인사 정도는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이렇게 추억 속에서만 남아 있는 게 모두를 위해 나을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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