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할아버지는 오렌지를 먹고 갔을까?

받던 오렌지가, 나누는 오렌지가 되기까지

by 오늘도

프랑스에는
크리스마스 밤,
힘들게 선물을 배달하는 산타할아버지를 위해
오렌지 하나를 남겨두는 문화가 있다.



이제는
그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의 입장이 아니라
‘아이에게 건네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
마주하게 된다.






아이를 키우고 나서야
크리스마스는
선물의 날이 아니라
기억을 전해주는 날이라는 걸
조금 알 것 같아졌다.





오래전,
크리스마스는 지금처럼
반짝이는 포장지로 가득한 날이 아니었다.



그 시절 오렌지는 비쌌고,
겨울에 만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신선한 과일이었다고 한다.



남쪽에서 먼 길을 건너와야 했고,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오렌지 하나는
과일이라기보다
어른이 아이에게 건네는
확신 같은 것이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야.”



말로 하지 않아도
아이 손에 쥐어진 오렌지가
그 말을 대신해 주던 시절.







가난했던 아이들은
그 오렌지를 바로 먹지 않았다고 한다.



껍질을 벗기기 전,
향부터 맡고
손바닥으로 천천히 굴리며
방 안에 냄새가 퍼지게 했다고.



그 향이
크리스마스의 전부였으니까.



그래서 그 기억은
부족함이 아니라
따뜻함으로 남아 있다.






시간이 흘러
아이들은 자랐고,
세상은 훨씬 풍족해졌다.



오렌지는
더 이상 귀한 과일이 아니게 되었고,
아이들이 받는 선물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아졌다.



그런데도
‘크리스마스에는 오렌지가 있었다’는
이상하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받던 오렌지는
어느새 나누는 오렌지가 되었다.



힘들게 밤새 선물을 배달하는
산타할아버지를 위해
오렌지 하나를 남겨두는 문화로
조용히 바뀌었다.






엄마가 되고 나서야
이 장면이
이상하게 마음에 오래 남는다.



아이에게서
무언가를 빼앗는 장면이 아니라,
아이가
기꺼이 내어놓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이건 내가 받은 것 중에
가장 좋았던 거야.”
아이는 그렇게 말하지 않지만,
오렌지를 내려놓는 손에는
그 마음이 담겨 있다.







나는 안다.
그건
오렌지 하나가 아니라는 걸.



아이에게
‘받기만 하는 날도 있지만,
나누는 날도 있다’는 기억을
조용히 남겨두는 일이라는 걸.



아침이 되면
오렌지는 사라질 것이다.



아이는
산타할아버지가 먹고 갔다며
환하게 웃을 것이다.



그리고 그 웃음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이 아이에게
크리스마스가
언젠가 오렌지 향처럼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주기를.



받던 오렌지가
나누는 오렌지가 되기까지.


이 변화의 한가운데에
엄마가 있다는 사실이
나는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