쏜살같이 지나간 3개월 돌아보기
저는 오히려 성실함과 진지함 쪽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 성실함은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하는 성실함이 아니라 주어진 일과 때로는 주어지지 않은 일까지도 다른 각도에서 보려는 성실함이어야 합니다.
<당신과 나의 아이디어 中, 김하나>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일하고 있던 날이었다. 오피스에서 데이터 분석 파트인 모카와 앉아 A/B테스트 데이터 후 분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헤이즐이 다가와 나를 부르더니 '핀리는 이제 도망 못 간다'는 말과 함께 수습 해제 축하 인사와 함께 하얀 목줄의 ID카드를 건넸다. 인프랩에 온 지도 슬슬 3개월 언저리가 다 되어가고 있었고, 이미 오후 일찍 쭈에게 축하 DM을 받았던 지라 크게 놀랍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ID카드의 색깔이 바뀌니 수습이 해제되었다는 사실이 정말 실감이 났다.
2개월 회고를 쓴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3개월이 지났다니. 얼떨떨하기도 했다. 수습 회고니 정말 솔직하게 기록하는 거지만, 입사 후 꾸준히 '아, 수습 통과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게 있어 수습 기간은 회사와 신규 입사자가 서로 핏을 맞춰나가는 시간으로, 단순히 일방향적인 평가가 이루어지는 기간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사람이다 보니 신경은 쓰였다. 나는 회사와 팀원들을 이렇게 바라보고 있는데, 상대의 평가는 전혀 다른 방향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곳은 1개월, 2개월 피드백이 있기 때문에 참고 의견을 기회로 삼을 수 있다.)
이런 고민을 하게 된 연유에 특별한 배경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형 사고를 쳤다거나, 조직 전체 분위기가 평가에 인색하다거나 하는 문제는 전혀 아니었지만 뛰어난 동료들과 일을 하다 보니 나로서는 매 순간 긴장의 연속이었다. 업무에 본격적으로 투입되고 나서부터는 PO로서 내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이 눈에 띄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임에도 매일이 고민의 연속이었다. '냉정하게 생각했을 때, 내가 이 회사에 필요한 사람일까?'라는 질문이 내내 따라다녔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런 고민이 부질없음을 깨달았다. 애초에 이 회사에는 단순히 수습 기간이라는 이유로 일에 매진하거나, 소홀히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을 보면서 나 역시도 어느 순간부터는 마음을 바꿔먹었던 것 같다. '당장 내가 이곳에서 배우는 것이 충분하다면, 그 과정에서 일말의 기여라도 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3개월은 내게 충분히 의미 있는 시간이 아닌가? 그냥 하고 있는 일이나 잘 하자'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으로 나의 고민은 마무리되었다.
*입사 후 3개월 동안 진행했던 태스크나 프로젝트들 중에서 특히나 기억에 남았던 업무들을 리스트업 해보았다.
첫 직무 과제, 로드맵 카드뷰 개선
이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이미 회고를 쓴 바가 있기에 크게 더 할 내용은 없지만, 인프랩 팀은 어떤 업무 프로세스로 일하는 팀인지 감을 잡을 수 있었던 고마운 과제였다. 항상 그 정립된 프로세스대로만 일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대략적으로 QA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 그리고 디자인 리뷰와 QA는 어느 단계에 진행하는지 파악해 나갈 수 있어 좋았다. 무엇보다도 함께 협업했던 PD 율무, FE 리온과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추고 기존 '로드맵'의 색을 해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좋았던 기억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아마 어설픔은 숨겨지지 않았겠지만, 레퍼런스도 열심히 찾아보고 나름대로 좋은 답을 찾아가고자 했었던 나의 첫 프로젝트.
유저 실명 데이터 수집 과정 개선
CX 팀의 불편점을 해결하기 위해 시작된 내 두 번째 태스크. 지금 생각해보면 1차적인 방편에 불과한 조치였지만(이후에는 어드민 상에도 필요 기능이 업데이트되었다.) 수료증 발급 관련해 고질적으로 문제가 발생하던 지점을 개선해 뒤에 생길 수 있는 문제들을 사전 차단하는 목적으로 일이 진행되었고, 당시 PD 분과 록이 많이 고생해 주셨다. 개발적으로 복잡한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아도, 때로는 생각보다 단순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운 프로젝트였다. (덧붙여, 어떤 조건에서 유효성 validation이 동작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사이드 이펙트로는 어떤 문제들이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사용자 액션에 따른 이벤트 페이지 구축
마케팅 파트와의 첫 협업. 인프런에서는 어떤 이벤트가 진행되고 있는지, 지금까지 어떤 이벤트의 성과가 특히 좋았으며, 앞으로는 어떤 이벤트를 기획하고 진행할 예정인지 마케팅 파트의 계피에게 히스토리를 들으며 즐겁게 진행했던 태스크. 티켓 단위로 보았을 때 규모가 큰 프로젝트성 업무는 아니었지만 다른 파트가 일하는 방식을 파악하고, 실제 유저들이 해당 이벤트에 높은 참여도를 보이는 모습을 보며 뿌듯함을 느꼈던 업무여서 기억에 많이 남는다.
포지션 정렬 기준 및 입사축하금 필터링 추가
채용 플랫폼 '랠릿'에서 처음으로 진행한 B2C 티켓. 이 태스크는 이전 실무자분께 인수인계를 받으며 실질적으로 팔로업만 진행하고 초기 기획에는 참여하지 않았는데, 추천 로직은 어떻게 설계되며 추천을 위한 시퀀스 값으로는 어떤 요소들이 있는지 파악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 이에 더해, 서비스에서 무게를 두고 있는 key feature의 확장성에 대해서도 고민해 볼 수 있었다.
첫 A/B테스트, 강의 상세 페이지(SDP) 내용 노출 순서 변경
충분한 모수를 확보하기 위해 유료 강의 대상으로 핵클을 통해 진행한 첫 A/B 테스트. 가드레일 지표인 매출에 영향이 크게 갈 수 있는 실험이었기에 노출 범위를 최대한 신중하게 설정해야 했었던 실험이기도 했다. 결과가 예상했던 방향으로 흘러가며 일주일 만에 일시 정지하게 되었지만, 대조군과 실험군의 전환 또는 개선율 수치에 변인이 될 수 있는 요소들로 어떤 것들이 있을 수 있는지 더 구체적인 고민이 더 필요했다는 레슨을 얻은 실험이었다. (공정한 실험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변인 요소를 하나로 통제해야 하고, 통제 변인으로 정의한 하나의 요소 안에 또 다른 통제 변인이 있을 수 있음을 인지 후 실험의 진행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는 점. 실험 진행 후 데이터 후 분석을 위한 이벤트 프로퍼티 값이 잘 설정되어 있는지도 더블 체크.)
포지션 탐색 필터링 기능 개선
미흡했던 정책 정리, 요구사항과는 무관한 인터렉션, 디자인과 기획에서 싱크가 맞지 않았던 부분 등 진행했던 업무 중 가장 오랜 시간 회고를 진행했던 프로젝트. 기획 전 충분히 아이데이션 하는 자리를 가진 것은 좋았지만 이외의 부분에서는 아쉬움이 많이 남았던 프로젝트였다. 기본이 탄탄한 초기 기획과 1-2차 스펙 구분에 따른 일정 관리의 중요성, PO로서 명확한 요구사항 전달과 유저 인터렉션과 연관된 케이스에 대해 충분히 디테일을 고려해야 함을 배웠다. 더 자세한 회고는 컨플루언스에..(?)
회사 소개 페이지
최근 진행했던 태스크 중에서 가장 재밌게 진행했던 업무였다. (포지션 탐색 사용성 개선 업무를 진행하며 느낀 점이 많았기에, 같은 실수는 반복하고 싶지 않아 특히 신경을 기울이기도 했다.) PD로 참여했던 엠제이와 FE의 홍시, BE의 우주와 함께 1차 스펙을 아이데이션, 산정하며 MVP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졌던 점이 이제 와 돌이켜봐도 참 즐거웠던 기억이다. 과정에서 엠제이가 레퍼런스를 꼼꼼히 찾아주시고, 디자인 기획 방향성에 대해 깊게 고민하시는 모습을 보며 '프로덕트 디자이너는 어떤 관점에서 고민을 하시는구나' 옆에서 많이 보고 느낄 수 있었다.
당시 일정 내 구현 가능한 범주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고, Open API 사용과 자체 정보를 활용했을 때의 장단을 따져보며 경쟁 플레이어들과 어떤 차별성을 추후 가져갈 수 있을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무엇보다 퍼널 관점에서 여러 아이디어가 오고 갔었는데(e.g. 예를 들어, 어떤 데이터를 어떻게 노출시킴으로써 구직자들이 랠릿이 제공하는 정보를 '가치 있다고' 느끼도록 인지 시킬 수 있을지. 그 과정에서 사용자 참여를 유도 시킬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 등) 그 과정에서 리텐션과 유입을 놓고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와 같은 재밌는 논의도 있었기에 더 기억에 남는 태스크.
첫 장기 프로젝트, 통합인증 프로젝트.
현재 TF 형태로 진행 중인 첫 장기 프로젝트. 이 프로젝트의 PO로 참여하며 제대로 된 애자일 형태의 업무를 배워나가고 있고, 프로젝트 성격에 맞게 1~2주의 프로젝트를 병행하며 목표한 스토리를 팀 전체와 함께 달성해 나가는 귀한 경험을 쌓고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이런 것들을 배웠다. 스크럼이라는 것이 단순히 한 자리에 모여 개인이 하고 있는 업무 상황만을 공유하는 것이 아님을, 스프린트 QA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e2e 테스트를 진행하는 방식을 도입해 볼 수 있음을, 프로젝트 일정 관리와 시간 추정을 위해 킥오프 이전에 약속되어야 할 규칙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파악하는 일 등. 스프린트의 플래닝부터 회고까지 마일스톤 달성을 위해 고려되어야 할 요소들을 하나하나 체득해 나가고 있다. 아마 팀마다 일하는 방식 그리고 프로젝트 성격의 차에 따라 갈릴 수 있는 부분들인데, 프로젝트가 완전히 종료되고 나서 얻은 배움들에 대해 나누고 공유할 수 있는 부검 시간을 가질 예정에 있다.
이전 글에서 '나는 이 일을 할 깜냥이 되는 사람인가?'라는 고민을 했었다고 남긴 적이 있다. '데이터를 기반으로 의사 결정하고 함께 일하는 구성원들을 설득하는 역량이 있어야만 진짜 PM/PO라고 할 수 있지 않나'라는 생각에만 짓눌려 한숨만 깊어졌던 게 비교적 최근 일이었다. 하지만 이 데이터라는 게 참 말처럼 읽고 해석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같은 데이터를 두고도 여러 관점으로 해석이 가능했고, 어떤 데이터와 연결시켜 가설을 만드느냐에 따라 결론이 전혀 달라지기도 했다. (심지어 그 데이터라는 것은 어떤 변인에 의해 노이즈가 끼기도 참 쉽다.)
이러한 고민이 있음을 회고 시간에 토로하듯 말했는데, 이야기를 들은 향로가 물었다. '객관적인 지표나 데이터를 보는 것은 당연히 중요하지만, 만약 볼 수 있는 데이터가 전혀 없는 상황이 오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이었다. 사자의 심장으로 직관과 경험이 이끄는 방향으로 결정을 내릴 것인지, 어려운 상황에서도 리서치를 통해 최소한의 데이터를 수집해가며 팀원들을 설득할 것인지, 만약 리소스 상 이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지. 물론 어떤 선택지도 설득의 논리만 잘 갖춰진다면 정답이 될 수 있다.
단연 data-driven만의 문제는 아니고, PO로서 갖춘 개발적인 역량에 대한 이야기나 비즈니스 시각에 관한 고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개발 언어를 공부하는 신입 기획자를 만났는데 이상하게 만감이 교차했다. 어떤 공부든 안 하는 것보다야 훨씬 도움이 되겠지만 뭔가 마음이 복잡했다. 년차 차이가 거의 안 나다 보니 나도 그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는 지라 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기획자는 개발자가 아닌데. 내가 인프랩에 와서 좋은 팀원 분들과 일하면서 배운 점은 기획자는 절대 프로덕트 디자이너여서도, 데이터 분석가여서도, 개발자여서도 안 된다는 점 같다. 우선적으로 당장의 내게 필요한 역량은 한정된 리소스 내에서 최선의 기능 스펙을 산정하고, 일정을 수립하고, 프로덕트 팀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기획 의도와 설득력을 갖춰 구현 가능한 범주를 조율해 나가는 것으로 보인다. 이 조율과 합의점을 잘 찾아나가기 위해서 개발 지식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소통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만 알아도 충분할 것 같다는 쪽으로 기조가 바뀌었다.(물론 나의 경우, 웹-앱 경험을 쌓고 있는 중이기에 원활한 소통을 위한 현업에서의 지속적인 배움은 필요하다.)
모든 방면에서 스텟을 고루 갖춘 사람이 되기엔 너무 어렵고, 본인만의 강점을 찾아나가야 하는데 이 부분은 개인의 성향과도 직결이 되는 것 같아 조심스럽다. 나는 0에서 1을 만드는 과정을 즐기는 사람일까? 아니면 1에서 1.5 또는 그 이상을 만드는 것을 즐기는 사람인가? 이런저런 업무를 다양하게 경험해보며 가닥을 잡고 경험치를 쌓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조금씩 내 뾰족함, 나의 쓰임새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제발 그러길 바라며.. (주니어가 제 힘으로 역량을 발견해 나갈 수 있도록 방향을 이끌어주는 좋은 시니어가 있다는 것 = 성장하기 좋은 환경이라 생각한다.)
수습 회고가 의식의 흐름을 따라 조금 멀리 온 것도 같은데, 다시 결론으로 돌아가서 함께 만들어나가는 제품에 열정이 있는 일잘러 분들과 함께 하게 되어 정말 기쁜 마음이다. 지금까지의 3개월처럼 계속해서 더 나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 같이 성장하기 위해서 고민하고 즐겁게 일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 일단 나부터 잘하기..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