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같이 시간이 빨리 흐른다
#4월 1일
3월 31일 전시가 끝나고 4월의 시작, 만우절에 산내에 다녀왔다. 지인이 게스트하우스로 운영했던 공간을 공방+게스트하우스로 리-오픈을 한다고 해서 오전부터 후루룩 나와 꽃가게에 들러 선물용 꽃을 사갔다. 공간이 있는 골목 입구부터 멋지다- 라는 말을 몇번이나 했는지 모를 정도로 귀엽고 아름답게 꾸며놓았다. 공간에도 손맛이 있다는 걸 새로이 느낀 하루, 기분 좋은 배움의 시간을 보냈다.
#METOO #WITHYOU
중년으로 보이는 손님이 책가게에 오셨다. 어딘가에서 소개된 책가게를 보고 한번 와보고 싶었다 하시며 한국인의 풍류과 흥을 주제로 한 책이 없냐며 물었다. 그런 책이 없다 하니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책가게 여기저기를 둘러보시더니 옛 서적을 하나 집으면서 '오- 이런 책이 다 있네' 하고 좋아하셨다. 나는 '마음에 드는 책이 있어 다행이네요' 하고는 계산을 했다. 기분 좋은 얼굴로 나가시면서 뭔가 생각났는지 뒤를 돌아 말했다. '요즘은 뭔가 어울려 흥을 나누는 문화가 사라져가서 아쉬워, 같이 춤도 못 추겠어. 미투다 뭐니 하는 것 때문에...' 헉... 이 말을 듣는 순간 내 뒷목에 지나가는 혈관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미소로 배웅하는 내 얼굴은 경직될 뻔 했지만 스리슬쩍 이빨을 깨물며 말했다. '개념있게 놀아야죠' 그랬더니 그 손님은 '개념있게라...' 하는 외마디를 남기며 책가게를 나갔다.
미투운동으로 내 주변의 많은 피해자와 가해자들이 보였다. 분명한 건 나도 그 피해자와 가해자 범위 안에 있고. 그걸 알고 나니 내가 반성하고 내 사회를 수정해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그건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면 안된다고, 이제 그런 때로 돌아가면 안된다고 표현하면서 말이다. 난 내가 할 수 있는 건 할 수 있는 사람일테다.
#또하나의 그림
삼각 프레임 캔버스를 왜 샀는지 모르겠지만 새로운 그림을 만들 수 있겠다 싶어서 이리저리 머리를 짜다가 마침 수명이 다된 촛대 전구가 있길래 이걸로 연결해봐야겠다 싶었다. 전구에 색을 칠해보고 지워보다가 색깔을 맞춰보고 캔버스에 배경색을 칠하고 뭔가 더해졌으면 좋겠다 싶어 실을 꿰었다. 그랬더니 연결은 되었는데 괴괴한 그래도 멋진 그림 완성. 헤헤헷
# 첫 드로잉 모임
남원 구도심 자락을 여기저기를 걷다보니 이 정취를 그림으로 그리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마음만) 그러다 올 초에 전문전문(?) 드로잉 작가와 남원에서도 가끔씩 해왔던 드로잉 모임 이벤트를 열어보자 하는 이야기가 나와 날짜부터 (덜컥) 정했다. 그러다 3월에 일이 있어 서울을 갔는데 마침 북촌 드로잉 모임이 있길래 냉큼 참여했다. 걷고 그리고 느끼는 시간이 참 좋았고 드로잉 코스를 짜자 싶었다. 이벤트 공지를 열고 모집 시작- 광주, 서울, 남원시민이 모였다. 당일 솔찬히 비가 왔지만 걷고 본 공간의 운치를 더 느낄 수 있었다. 책가게 돌아와 사진으로 찍어온 그림을 그린 시간. 짜장면을 시켜먹고 그림을 그린 시간. 난 가이드는 처음 해봤는데 걸음도 혼자 앞서고 타이밍 맞춰 말을 잘하지 못했다. 그래도 뭐, 다음엔 좀 낫겠지 (^^;)
아참참, 뭔가 해보려고 할 때 그 뭔가를 해본 사람의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번 드로잉모임을 준비하면서 또 느꼈다. 이 세상 모든 선구자(!!)께 감사드린다 :)
#두번째 독서모임
4월 20일은 책 [일하지 않을 권리] 를 읽고 모인 두번째 독서모임일이었다. 이 책은 지인이 번역을 맡았다고 하여 꼭 봐야지 벼르고 별렀던 책이었다. '일'이란 키워드에 관심이 많으니 술술 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읽는 속도가 더뎠다. 아마 그 이유는 철학과 사회학이 얽힌 어려운 내용 때문이기도 했지만 가게 일이다 인터뷰 글 쓰는 일 등 내 일들의 우선순위에 밀려서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로지 이 책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적었다. 아무튼 이 책을 읽고 기억에 남는 말은 '단절점'이었다.
단절점은 몸에 밴 습관과 신념이 의문 속으로 던져지는 일종의 개인적 위기를 표현한다. 생애사적 사건, 새로운 도덕적 통찰, 떠나지 않는 억압감 등이 익숙한 습관과 신념에 질문을 던져, 평소와 다름없는 환경이나 일과를 점점 더 견디기 어렵게 만든다.
-책 [일하지 않을 권리] p167 중
이전에 나 역시 동의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일하기와 관련된 고정관념들 '놀면 뭐하노, 이런 거라고 해야지' '남의 돈 버는 게 쉬운 게 아니다' '까라면 까야지' '열심히 일한 자, 떠나라!' 와 같은 말들이 더이상 나는 동의할 수 없다. 나에게도 단절점이 생긴 것이다. 일상을 다채롭지 못하고 하고, 주변을 돌아볼 시간을 뺏아가는 일하기는 이제 부정하고 싶다.
독서모임에서 나온 주된 키워드는 기본소득이었다. 기본소득은 무엇인가, 일에 매몰되지 않는 사회, 보다 여유를 갖고 주변을 보기 위해서 기본소득은 필요하다, 그렇다면 과연 기본소득이 가능할 것인가, 우리나라에 도입되려면 한참 걸릴 것이다, 핀란드도 시도했다가 중단됬다더라 하는 이야기들을 나눴다. 기본소득 도입을 바라는 사람으로써 이런 이야기를 책가게에서 나눴다는 게 신기하다. 공간에도 단절점이 있는 것일까? ^^;
#할머니's
4월 20일 볕좋은 봄날. 오후에 책가게 앞에 할머니들이 오손도손 모였다. 걷는 걸 도와주는 보조기구를 하나씩 끌고는 가게 문 앞에 한참을 있었다. 뒤쳐지는 할머니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 모습이 짠하기도 하고, 자매애가 강하게 느껴져 가게 안에서 한참을 바라봤다. 이런 할머니 무리를 보면 안심이다. 함께 늙어가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는 것. 나도 있겠지? ㅎㅎ
비록 뒤에 온 할머니가 검은 비닐봉지를 책가게 앞에 쿨하게 버리고 가셨지만... (할머니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버려주세요. 밭에 태우지도 마시고 ㅠㅠ)
#아르바이트
지인의 소개로 아르바이트를 얻었다(!) 지리산권역에 살고 있는 청년들을 찾아 그들의 일과 삶을 인터뷰하고 글을 정리하는 일을 맡았다. 직장 다닐 때 회의 성격의 인터뷰는 종종 해봤지만 본격 인터뷰 일은 처음. 여러 인터뷰 책을 읽으면서 마음의 준비에 돌입했다. 설레면서 불안한 마음, 뭔가 처음 시작할 때면 어김없이 드는 긴장을 갖고 시작했는데 4월 한달 동안 벌써 지리산권역 한바퀴를 돌며 청년을 만났다. 지리산권 청년의 일과 삶 을 펼쳤을 때 '시골살이가, 작은 도시생활 역시 다양한 일상으로 만들 수 있구나'가 보인다면 나는 충분이 이 일로 만족감을 얻을 수 있을 거 같다.
여러 일을 동시에 하는 것이 에너지를 분산시키기도 하고, 당연히 녹록치 않지만 어느 일이든 장(점)단(점)은 있을 터. 그 장단을 내가 맞출 것인가 말 것인가 내가 결정했으니 해볼 수 있는 데까지는 하고 싶다. 무엇보다 교통편이 불편하긴 하지만, 남원, 함양, 산청, 하동, 구례 곳곳을 돌아다니는 재미는 큰 장점! 호홋
#4.27 남북정상회담
내가 겪는 역사를 기억하고, 내가 그 역사를 만든다고 생각하는 것. 참 중요하다. 4월 27일은 마치 내가 전혀 생각조차 안했던 미지의 세계를 조만간 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부푼 하루였다. 암튼 선물받은 멋진 신문 1면을 호기롭게 책가게 유리창에 붙여 기념했지만 자꾸 사람이 걸어오는 것 같아 지레 깜짝 놀라했다 -_-
#책포장서비스
일회용 쓰레기를 늘리는 것 같아 찔리면서도 여기서 책을 주문한 사람들에게 좋은 선물로 드리고 싶은 마음이 커서 책포장서비스를 하고 있다. 포장의 달인이 되고 싶다. 착착 눈으로 치수를 정확히 재어 이왕 싸는 거 낭비하는 종이나 비닐 없이 딱딱 만들어지는 그 순간까지 연마해야지.
#책선물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사를 준비하는데 자신이 봤거나 공부했던 책들을 버리기 아까우니 괜찮다면 책가게에서 받을 수 있냐고. 책 사진들을 함께 찍어 보내주셨는데 전부는 모르겠지만 내가 관심있는 주제의 책들이 눈에 띄었다. 감사히 받겠다 하니 며칠 뒤 책이 도착했다. 하나하나 책을 닦고 누구로부터 왔는지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해놓고 책장에 꽂았다.
종종 처음 본 손님으로부터 책을 기부하고 싶다거나 혹시 중고책 위탁판매를 여쭤보는 분들이 있다. 책가게 운영에 도움이 되고 싶다하는 분도 있기도 하고 신경써주시는 것 같아 마음은 너무 고맙지만 선뜻 '네, 주세요' 라고 못했다. 일단 책가게와 맞는 책인지 모르고, 받겠다 했는데 뭔가 안 맞아 버리게 되거나 하는 등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을 마주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책가게의 컨셉이나 결이 뭐예요 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뭐'예요 라고 딱 말할 수 없지만 어쨌든 결에 맞춘 책들을 큐레이팅하려고 애쓰고 있기에 앞으로도 중고책 기부 문의는 신중히 응대해야겠다. 그리고 받은 책들은 끝까지(?) 책임지기로.
책가게 오픈 8개월차인 2018년 4월, 많은 일을 하며 바쁘게 보냈다. 자영업이 어느 정도 적응된 것 같지만 여전히 모르는 것 투성이인 것 같고. 그래도 길냥이급식소에 오는 고양이들이 하나둘 늘어나는 걸 보면 4월도 잘 살았다 자평할 수밖에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