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나라

일본을 이해하는 제일 중요한 단어

by 이순신서점

1. 일본과 일본인의 행동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단어를 말하라면 저는 단연코 '책임'을 꼽겠습니다.


2. 일본 사람들과 일하다 보면 참 답답합니다. 일 진행이 더딥니다. 모 대기업 지사장님께 하소연을 했더니, 답을 말씀해주시더군요. '내가 다 책임질게' (全責任を取る) 이 말 한마디면, 마법처럼 일이 빨리 진행된다고. 정말 그렇더군요. 우리보다 더 빠릅니다.


3. 책임을 지지 않는 방법은 책임을 분산하면 되겠지요. 그러다 보니 회사에서는 아주 작은 일도 여러 명의 검토와 결재를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제가 잠깐 있었던 일본 모 기관에서 출장을 갈때는 6명의 결재를 받아야 했습니다. 담당, 주임, 부부서장, 부서장, 회계담담자, 지출담당자. 문제가 생기면 같이 책임을 지는 겁니다. 우리도 비슷한 면이 있지요.


4. 책임을 회피하는 방법은 책임을 아래로 내리는 것입니다. 코로나 시기에 마스크를 배부할때, 후생노동성은 마스크 필요개수 파악을 각 지자체에 하달합니다. 지자체는 하위 지자체에 하달합니다. 그러면 동사무소는 관할지 주민들에게 우편을 보냅니다. 여기서 살고 있는지, 몇명이 사는지, 마스크 받을 건지를 묻고, 주민이 회신용 봉투에 담아 동사무소에 보냅니다. 동사무소는 그걸 집계해서, 상위 지자체에 보내고, 후생노동성이 그걸 받아서, 마스크 발주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아베노마스크 3장 받는데 3달 걸렸습니다.


5. 왜 이러는 걸까요? 동사무소에 거주자 정보가 없어서 그럴까요? 그렇진 않을 겁니다. 마스크가 남거나, 부족할 경우를 대비하는 겁니다. 주소지에 등록은 되어 있는데, 살지 않는 분도 있을테지요. 보냈는데 반송되면 누가 책임을 질겁니까? 혹시 문제가 생겨도 주민들 책임이 되는 겁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우리도 이런 구석이 있지요.


6. 책임을 질때를 대비해 기록을 꼼꼼하게 합니다. 일본의 기록문화가 괜히 발달된 것이 아닙니다. 누가 이 결정에 참여했고, 누가 어떤 말을 했는지, 항상 기록을 남깁니다. 제가 참석했던 회의도 나중에 제 코멘트를 적어서 보내 주더군요. 의도와 다르면 고칠수 있습니다. 물론 고쳐달라고 한 것 조차 기록에 남습니다. 기록 문화의 발달에 책임이 일정 정도는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7. 일본 신입사원들은 입사하면 '호렌소'를 가장 먼저 배운다고 합니다. 보고(호오코쿠), 연락(렌라쿠), 상담(소오단)의 앞 글자를 딴 말입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상사에게 보고하고, 옆 부서에 연락하고, 모르면 상담하고 물어보라는 말입니다. 이 또한 집단이 결정해서 개개인의 책임을 줄이려는 방책의 하나가 아닐까요?


8. 이렇게 책임을 나누고 회피하고 아래로 내리고 하는 문화가 발달되다 보니, 정작 책임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예전에 큰 일이 생겼을때 책임을 지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가끔 있긴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더더욱 책임을 나누고, 피하는 방법이 발달된거 아닌가 싶습니다. 책임을 중시하는 사회인데,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가 된 겁니다. 아이러니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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