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지는 볼펜과 완벽의 추구
다 이유가 있더란 말입니다.
1. 일본은 문구용품이 종류도 많고 질도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볼수 없는 독특한 것들도 많은데.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게 지워지는 볼펜입니다. 볼펜으로 글씨를 쓰고 뒤에 달린 고무로 쓱쓱 문지르면 지워지는 볼펜. 고무와 종이가 마찰하면 열이 발생하는데 열을 받으면 사라지는 특수 잉크를 썼다고 합니다.
일본 여행갔다 오시는 분들이 주변분들 선물로 많이 사 가는 품목중에 하나죠. 저도 받은적이 있는데 그 이후로 잊고 있다가 일본 생활하면서 아하! 왜 일본에 이런 볼펜이 생겼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2. 일본에 도착하면 운전면허 발급 등 일본 관공서에 들를 일이 있습니다. 도착하면 민원 신청서를 쓰라고 하지요. 생소한 일본어인데다 획이 많은 한자까지 있다보니 보통 쓰다가 한두 군데는 틀립니다. 한국에서 하듯이 찍찍 두줄 긋고 제출합니다. 한참 기다리고 있는데 다시 써오라고 합니다. 획 하나 틀렸답니다. 항의를 해보는데 안 된답니다. 처음부터 다시 하라는거죠. 옳고 그름을 떠나 그렇습니다. 일본 사람들도 자주 틀리고 다시 쓸려니 열 받았겠죠. 그래서 만든게 지워지는 볼펜입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네요. 볼펜 하나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더란 말입니다.
3. 물론 이것도 설중의 하나입니다. 다른 설도 있더군요. 원래 이 특수잉크는 투명해지는게 아니라 열을 받으면 색이 변하는 것이 특성이라 머그컵에 뜨거운 물을 부으면 아름다운 무늬가 나타난다던가 이런 용도로 사용했답니다. 쓰임이 제한적이라 큰 돈은 안 되었나 보네요.
4. 그러다가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권에서는 초등학생들도 연필이 아니라 볼펜이나 만년필을 사용하고, 쓰다가 틀리면 잉크를 지울수 있는 약품을 쓰는데, 지우고 나서는 그 자리에 일반적인 볼펜으로는 써지질 않으니 지운자리에 쓸수 있는 특수한 볼펜을 썼다고 하네요. 일반볼펜. 지우는 약품, 특수볼펜. 3종 세트가 없으면 학교에 못가는 거죠. 이걸 보고 지워지는 볼펜을 만들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왜 만들었는지를 떠나 1억개 판매를 돌파했다니 축하해줍시다.
5. 완벽을 추구하는 문화, 일견 답답한 부분도 있지만 일본의 장인정신의 근간이지요. 일본이 원래부터 장인정신이란게 있었던건 아니라고 합니다. 여러 설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는 바로 "평화"가 "장인정신"을 낳았다는 설입니다.
6. 임진왜란 관련 드라마에서 "전쟁은 기회다"라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외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전쟁은 신분을 바꿀 절호의 기회이지요. 반대로 평화는 신분제도가 고착화된다는 의미입니다. 전국이 통일되고 신분제가 안정화되고 에도에 직업별로 마을이 형성되는 시점부터 장인정신이 생겨났다네요.
7. 여담입니다만 아직도 도쿄에는 직업별로 마을을 꾸려 살았던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신주쿠 산쵸메 근처에는 햐쿠닌쵸(百人町)라는 동네가 있습니다. 백명이 사는 마을이라는 곳이죠. 조총부대 1부대의 기본이 100명이서 이런 이름이 되었다네요. 신분 이동이 안되니 자연스럽게 직업의 깊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여러 설중에 하나이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