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자 난중일기) 뒷담화하는 이순신
2023년 1월 15일, 음력 12월 24일 (12회차)
* 읽기 어려운 난중일기, 1회독을 목표로, 오늘자에 해당하는 일기만 발췌하여 소개하고, 짧은 생각을 덧붙여 연재 하고 있습니다. 매일 이순신과 하루를 함께 하고 싶으신 분들은 팔로우 또는 구독 바랍니다.
1597년 12월 24일
눈이 오다 개다 했다. 아침에 이종호를 순찰사에게 보내어 문안했다. 이날 밤 나덕명이 와서 이야기하는데, 머무르고 있는 것을 싫어하는 줄도 모르니 한심하다. 밤 10시경에 집에 편지를 썼다.
1. 이순신도 뒷담화를 까네요.
2. 나덕명은 왜란이 났을 때 함경도에 유배중이었는데, 왕자들을 잡아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긴 국경인에게 대항해서 의병을 일으킨 사람입니다.
3. 오늘자 난중일기 시점에는 아버지 상으로 고향인 나주에 내려와 있었고, 상중에도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4. 훌륭한 분인것 같은데, 눈치는 없었나 봅니다. 아니면 둘 사이에 우리가 모르는 악연이 있었던 걸까요?
이해를 돕기 위한 사건일지
1593년 1월 8일 조명연합군 평양 수복
1593년 4월 18일 왜군 서울 철수
1594년 10월 10일 명, 일본과 강화재개 조선에 통보
1597년 1월 28일 이순신 파직, 원균 삼도수군통제사(2월)
1597년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조선 수군 승리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전사
오늘의 인물 : 나덕명(羅德明)
1551년(명종 6)∼1611년(광해군 3). 조선 중기 의병. 자는 극지(克之)이고, 호는 소포(嘯浦)이며,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전라남도 나주(羅州) 출신이다.
부친은 수 의금부도사(守義禁府都事) 나사침(羅士忱)이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기상이 늠름하였으며 학문에도 뛰어났다. 곤재(困齋) 정개청(鄭介淸)에게서 수학하였다.
1579년(선조 12)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2등 9위로 합격하였으며 승훈랑(承訓郞)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다.
1589년(선조 22) 나덕명은 기축옥사(己丑獄死: 일명 정여립의 난)에 연루되었다. 그는 정개청의 문하생이었으므로 역적 정여립과도 가까웠을 것이라는 무고를 받아 함경도 경성(鏡城)으로 유배되었다.
유배 생활 중 임진왜란이 일어났는데, 관노 국경인(鞠景仁) 등이 작란하여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및 수행신하들을 왜적에게 넘겼다. 이에 의병을 일으킨 함경북도병마평사(咸鏡北道兵馬評事) 정문부(鄭文孚) 막하에 들어가 싸웠다. 이후 쌍포(雙浦) 백탑교(白塔橋) 싸움에 참전하였으며, 1594년 귀향이 풀린 후에는 형개(刑玠)에 있던 허충의‧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1537∼1599)과 함께 일본에 대적하였다. 또한 정유재란 때에는 아버지의 시묘살이 중이었음에도 판서(判書) 임담과 의병을 일으켜 전라남도 화순(和順)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이러한 공적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고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증직되었다. 1803년(순조 3)에는 충신으로 정려(旌閭)되어 무안군(務安郡) 일로읍(一老邑) 청호리(淸湖里) 주룡(住龍)마을에 충신각이 건립되었으며, 도내 사림(士林)이 소포사(嘯浦祠)를 지어 그를 배향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그 외 나주 금호사(錦湖祠), 고양(高陽) 덕양구(德陽區) 행주내동(幸州內洞) 충장사(忠莊祠) 등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