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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순신서점 Jan 15. 2023

오늘자 난중일기 번외편 (이순신을 알아봐 준 사람들)

1. 이순신은 조용하고, 강직했기 때문인지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적도 많았습니다. 그런 그의 진면목을 알아봐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2. 류성룡은 정읍현감으로 있던 이순신을 좌수사로 추천했고, 정탁은 옥에 갇힌 이순신을 홀로 변호해주었습니다. 명나라 장수 진린은 그의 진가를 알아보고, 선조에게 공을 알렸고, 노량해전에서는 마지막까지 함께 싸웠습니다.


3. 이 세 사람이 없었다면, 이순신이 제대로 쓰이지 못했을 겁니다. 이순신도 자신을 알아봐준 이런 사람들 덕분에 어려움을 견뎌낼수 있지 않았을까요?


4. 저도 어려울때 나를 이해하고, 지켜준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은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그분들께 오랜만에 연락을 돌려야겠습니다.  


아래는 징비록(서해문집 출간)의 관련 기록입니다.


류성룡 : 이순신을 좌수사로 추천


 "병법의 활용, 장수 선발, 군사 훈련 방법 등 어떤 것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까닭에 전쟁이 발발하자 패하고 만 것이다."


"이순신이 세운 공은 참으로 많았다. 그러나 누구도 그를 추천하지 않았다. 과거에 급제한 지 10여 년 만에 겨우 정읍 현감에 올랐을 뿐이었다."


"당시 왜적의 태도가 날로 극성스러워지자 임금께서 비변사에 명령을 내려 뛰어난 장수를 천거하라고 했다. 내가 이순신을 천거해서 그는 수사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순신의 갑작스런 승진에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정탁: 혼자서 이순신을 변호


"이순신은 옥에 갇히게 되었고 대신들이 그의 죄를 의논하기 시작했다. 그때 판중추부사 정탁이 홀로 일어서 간했다."


“그는 명장이오니 죽여서는 안 되옵니다. 군사상 문제는 다른 사람이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 또한 짐작하는 바가 있어 나가 싸우지 않은 것이라 생각됩니다. 바라건대 너그러이 용서해서 후에 대비토록 하십시오.”


진린: 이순신과 마지막까지 같이 싸움


"진린은 뜻밖의 대우를 받자 너무나 기뻐했다. 이때부터 그는 무슨 일이든 이순신과 협의해 처리했을 뿐 아니라 나들이를 나갈 때에도 이순신과 가마를 나란히 하면서 절대 앞서 나가지 않았다."


"그러자 진린은 임금께 이런 글을 올렸다. ‘통제사는 천하를 다스릴 만한 인재요, 하늘의 어려움을 능히 극복해 낼 공이 있습니다.’"


오늘의 인물: 정탁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백곡(栢谷). 예천출신. 현감 정원로(鄭元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생원 정교(鄭僑)이고, 아버지는 정이충(鄭以忠)이며, 어머니는 한종결(韓從傑)의 딸이다. 이황(李滉)과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1552년(명종 7) 성균생원시를 거쳐 155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65년 정언을 거쳐 예조정랑·헌납 등을 지냈다. 1568년 춘추관기주관을 겸직하고,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572년(선조 5) 이조좌랑이 되고, 이어 도승지·대사성·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1581년 대사헌에 올랐으나, 장령 정인홍(鄭仁弘), 지평 박광옥(朴光玉)과 의견이 맞지 않아 사간원의 계청(啓請)으로 이조참판에 전임되었다. 1582년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와서 다시 대사헌에 재임되었다. 그 뒤 예조·형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589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시 다녀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좌찬성으로 왕을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경사(經史)는 물론 천문·지리·상수(象數)·병가(兵家) 등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였다. 1594년에는 곽재우(郭再祐)·김덕령(金德齡) 등의 명장을 천거하여 전란 중에 공을 세우게 했으며, 이듬해 우의정이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72세의 노령으로 스스로 전장에 나가서 군사들의 사기를 앙양시키려고 했으나, 왕이 연로함을 들어 만류하였다. 특히, 이 해 3월에는 옥중의 이순신(李舜臣)을 극력 신구(伸救)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였으며, 수륙병진협공책(水陸倂進挾攻策)을 건의하였다.


1599년 병으로 잠시 귀향했다가 이듬해 좌의정에 승진되고 판중추부사를 거쳐, 1603년 영중추부사에 올랐다. 이듬해 호종공신(扈從功臣) 3등에 녹훈되었으며,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예천의 도정서원(道正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 『약포집』·『용만문견록(龍灣聞見錄)』 등이 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정탁(鄭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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