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총 19번 원균 욕을 합니다. 제가 일기를 일자별로 하나 하나 찾아 봤습니다.
2. 원균에게 분하다, 말하기조차 싫다, 놀라울 따름이다와 같이 약한 욕부터 시작해서 나중에는 가소롭다, 해괴하다, 흉악하다, 무식하기 짝이 없다와 같이 강한 욕도 합니다.
3. 일기 내용 중 원균을 욕하는 부분만 뽑아봤습니다.
분한 마음을 이길 길이 없었다.
괘씸하여 말하기조차 싫다.
깊이 탄식할 따름이다.
망령된 짓을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다.
우습기 짝이 없다.
잔꾀가 아주 심하여 말로 다 하기 어려울 정도다.
음흉한 꾀와 시기심은 이루 말할 길이 없다.
그의 속임과 거짓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잔뜩 취하여 흉측한 말을 마구 지껄였다. 매우 해괴하였다.
흉악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흉악한 일을 들었다.
취하여 망발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그 흉측한 모양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놀라울 따름이다.
쓴웃음이 나왔다. 무식하기 짝이 없다.
가소로웠다.
흉한 짓을 하였으나 여기에 적지 않겠다.
못된 짓을 많이 한다고 했다.
4. 둘 사이가 원래부터 안 좋았던 것 아닌것 같습니다. 전쟁 초반에는 작전회의를 하거나, 같이 술을 마시거나, 바둑을 두는 기록도 있습니다.
5. 원균과 사이가 틀어진 결정적 계기는 1593년 2월에 이순신의 부하들이 함정에 빠졌는데, 도와주지 않은 일 때문인 것 같습니다.이후에 군수품을 나누는 일, 장계를 올리는 일 등으로 서로 계속해서 부딪쳤습니다.
6. 이순신은 정말 싫었던지 원균이 곤장을 맞았다는 것도 일기에 적어 두셨네요.
7. 저도 직장에서 맘이 안 맞는 사람이 생기면, 집에 와서 욕하거나, 흉을 봅니다. 그러면 조금 마음이 풀리더군요. 장군님도 그러신 것 같습니다. 나중에 온 세상 사람들이 자기 일기를 볼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셨겠죠.
참고: 난중일기 중 원균 디스 기록
1593년 2월 22일
얼마 뒤 진도 지휘선이 적에게 포위되어 거의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우후가 바로 들어가 구해 내었다.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그 모습을 보고서도 못 본 체하고 끝내 도와주지 않았다. 괘씸하여 말하기조차 싫다. 분하고 분하도다! 이 때문에 경상도 수사 원균을 꾸짖었지만 통탄스럽다, 오늘의 분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모두가 경상도 수사 때문이다.
1593년 3월 2일
이영남과 이여념이 와서 원균의 비리를 전하였다. 깊이 탄식할 따름이다.
1593년 5월 14일
나도 역시 우수사의 배에 옮겨 타고 선전관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술이 여러 배 돌자 경상 수사 원균이 왔는데 술주정이 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배 안의 장병들 중 분개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망령된 짓을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다.
1593년 5월 27일
경상 우병사최경회崔慶會의 답장이 왔는데 송 경략이 보낸 불화살을 원균이 혼자 쓴다고 한다. 그 계략이 우습기 짝이 없다.
1593년 5월 30일
비가 하루 내내 계속 내렸다. 오후 4시쯤 잠시 갰다가 다시 비가 내렸다. 아침에 윤 봉사, 변유헌에게 적의 정세에 대하여 물어보았다. 이홍명이 보러 왔다. 원균이 송 경략이 보낸 불화살을 자기만 쓰려고 하였으나 병사 편에 공문을 보내 나누어 보내라 하니까, 공문의 내용을 매우 못마땅해하면서 이치에 맞지도 않는 말을 많이 했다고 한다. 명나라 관리가 보낸 불화살 1천 5백 30개를 나누지 않고 혼자서 모두 쓰려고 하다니 그 잔꾀가 아주 심하여 말로 다 하기 어려울 정도다. 저녁에 조붕이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해 현령 기효근이 배를 우리 배 곁에 대었는데, 그 배에 어린 처녀를 싣고 남이 알까 봐 두려워했다. 우습다! 나라가 위급한 이때 배에 예쁜 색시를 싣기까지 하니 그 마음 씀씀이가 꼴이 아니다. 그러나 그 대장이라는 원균부터가 이러하니 어찌 하겠는가? 윤 봉사가 일이 있어 본영으로 돌아갔다가 군량미 14석을 싣고 왔다.
1593년 6월 10일
맑다. 우수사와 가리포 첨사가 이곳에 왔다. 군사의 계책을 자세히 논의하였다. 순천 부사도 왔다. 삿자리 20장을 짰다. 저녁에 영등포 척후병이 와서 “웅천의 적선 네 척이 본토로 돌아갔고, 또 김해 바다 어귀에 있던 적선 1백 50여 척이 나와서 19척은 저희 나라로 돌아가고, 그 나머지는 부산으로 향하였습니다.” 하고 보고하였다. 새벽 2시쯤에 경상 수사 원균의 공문이 왔는데, 내일 새벽에 진군하여 싸움을 벌이자는 것이었다. 그 음흉한 꾀와 시기심은 이루 말할 길이 없다. 그래서 이날 밤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네 고을 군량에 대한 공문을 만들어 보냈다.
1593년 8월 19일
맑다. 아침을 먹은 뒤 원 수사에게 가서 내 배로 옮겨 타도록 청하였다. 우수사, 정 수사도 왔다. 원연과도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원 수사가 말하는 가운데 음흉한 일이 많았다. 그의 속임과 거짓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원균의 형제가 돌아간 뒤 천천히 노를 저어 진영에 이르렀다. 우수사, 정 수사와 같이 앉아 세세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1593년 8월 26일
비가 오다 개다 하였다. 원 수사가 왔다. 얼마 있지 않아서 우수사, 정 수사도 모였다. 순천 부사, 광양 현감, 가리포 첨사가 곧 돌아갔다. 흥양 현감이 와서 명절 음식을 대접하는데, 원균이 술을 마시자고 하여 조금 주었더니, 잔뜩 취하여 흉측한 말을 마구 지껄였다. 매우 해괴하였다. 낙안 군수가 풍신수길豊臣秀吉이 명나라 황제에게 올린 글의 초안과 명나라 사람이 군에 도착하여 기록한 글을 보내왔다.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였다.
1593년 8월 30일
맑다. 원 수사가 또 와서 영등포에 빨리 가자고 독촉하였다. 흉악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가 거느린 배 25척은 모두 내보내고 다만 일고여덟 척을 가지고 이런 말을 하니 그 마음 씀씀이와 일하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1593년 9월 6일
맑다. 새벽에 배 만들 나무를 실어 오려고 배 여러 척을 내보냈다. 아침을 먹은 뒤 우수사의 배로 건너가서 하루 내내 이야기를 나눴는데, 원균의 흉악한 일을 들었다. 또 정담수가 근거 없는 말을 날조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가소로웠다. 바둑을 즐기고 돌아왔다. 배 여러 척이, 파손된 배에 쓸 나무를 끌어 왔다.
1594년 6월 4일
맑다. 충청 수사, 미조항 첨사 그리고 웅천 현감이 보러 왔다. 종정도놀이를 하게 하였다. 저녁에 겸사복이 왕의 분부를 가지고 왔다. 그 글 가운데 “수군 여러 장수와 경상도의 장수가 서로 화목하지 못하니, 이제부터 예전의 나쁜 습관을 모두 바꾸라.”는 말씀이 있었다. 통탄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는 원균元均이 취하여 망발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1594년 10월 17일
맑다. 아침에 어사서성의 처소에 사람을 보냈더니 밥을 먹은 뒤에 도착하겠다고 하였다. 늦게 우수사가 오고 어사도 와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원 수사가 속임수를 썼다고 여러 번 이야기하였다. 아주 놀라웠다. 원균도 왔는데 그 흉측한 모양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아침에 종사관이 들어왔다.
1595년 2월 20일
맑다. 우수사, 장흥 부사, 신 조방장이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들은 원균의 못된 짓을 많이 전하였다. 놀라울 따름이다.
1595년 2월 27일
한식寒食이다. 날이 맑았다. 원균이 포구에서 교대하려고 도착하였기에 수사 배설이 교서에 절하라고 하였는데 불평하는 기색이 대단하였다고 한다. 여러 번 타이른 뒤에야 억지로 행하였다고 하니 쓴웃음이 나왔다. 무식하기 짝이 없다.
1595년 3월 12일
맑다. 아침을 먹은 뒤 노곤하여 잠깐 잠을 잤다. 경상 수사가 와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도 만호, 금갑도 만호, 나주 판관도 왔는데 군관들이 술을 내놓았다. 저녁에 소국진이 체찰사 처소에서 돌아왔는데, 그 회답 중에 우도 수군을 본도로 보내라는 것이 본의가 아니었다고 하였다. 가소로웠다. 또한 들으니 흉악한 원균은 곤장 40대를 맞고 장흥 부사는 20대를 맞았다고 한다.
1595년 8월 24일
부사副使와 함께 가리포로 갔더니 우우후 이정충이 먼저 와 있었다. 같이 남쪽 망대에 올라 좌우로 적들이 다니는 길과 여러 섬을 자세히 헤아려 보았다. 참으로 이 곳은 전라도 전체의 요충지이다. 그렇지만 이곳은 형세가 외롭고 위태롭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해남 땅 이진으로 옮겨 합친 것이다. 병영으로 돌아왔다. 원균이 흉한 짓을 하였으나 여기에 적지 않겠다.
1597년 4월 30일
아침엔 흐리더니 저물 무렵에 비가 왔다. 아침을 먹은 뒤 신 사과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병사에게 붙들려서 술을 마셨다고 한다. 병사 이복남이 아침 전에 보러 왔는데 원균이 저지른 일에 대하여 말하였다. 전라 감사도 원수에게 왔다가 군관을 보내서 안부를 물었다.
1597년 5월 5일
맑다. 새벽 꿈이 매우 어지러웠다. 아침에 부사가 보러 왔다. 늦게 충청 우후 원유남이 한산도에서 왔는데 원균이 못된 짓을 많이 한다고 했다. 또 진중의 장졸들이 다 그를 따르지 않으므로 앞일을 예측하기 어렵다고 했다. 오늘은 단오인데, 천리 밖 먼 곳으로 어머니 영위를 떠나 종군하고 있어서 예를 못 드리고 곡도 마음대로 못하니 무슨 죄 때문에 이런 앙갚음을 당하는가? 나와 같은 사정은 고금을 통해 찾아보기 힘든 일이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