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움. 그 소중함에 대하여.
여유로운 주말 오후.
많은 위로를 전해 준 책 한 권을 만났다.
김수현 작가님의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최근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한 문장으로 정리해 주는 것 같았다.
심지어 내용도 나에게 많은 위로를 전해 준,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의 소중한 표현들을 나누어 본다.
민주화 운동을 하닥 고문을 당했던 사람들이
과거를 떠올릴 때, 가장 괴로운 건 그때 겪은 고통이 아니라
고문관에게 잘 보이려 했던 자신의 비굴함이라 했다.
물론 그것이 우리의 잘못은 아니지만 사람의 자존감에 치명상을 끼치는 건,
부당한 대우 자체보다 부당한 대우에 굴복한 자기 자신인 거다.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법>이란 책에서는
타인의 삶을 훔쳐보며 내 삶과 비교하는 것이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 이야기했다.
그러니, 타인의 삶에 기꺼이 친구는 되어주되 관객은 되지 말자.
몇 장의 사진으로 요약된 그들의 삶보다
우리에겐, 우리의 삶이 더 소중하다.
우리는 인생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공적인 업무를 위장한 사적인 짜증과
걱정을 위장한 모욕과
질문을 위장한 무례함에
마음을 졸이고, 상처 받고, 미움을 쌓는다.
우리 삶에서 곧 사라질 존재들에게
마음의 에너지를 쏟는 것 역시 감정의 낭비다.
그만두면 끝일 회사 상사에게
어쩌다 마주치는 애정 없는 친척에게
웃으면서 열 받게 하는 빙그레 쌍년에게
아닌 척 머리 굴리는 여우 같은 동기에게
인생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에게
더는 감정을 낭비하지 말자.
마음 졸여도, 끙끙거려도, 미워해도
그들은 어차피 인생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일 뿐이다.
숫자라는 건
언제나 비교하기 쉽고 서열을 매기기 용이하다는 특징이 있다.
예를 들어, 세모와 동그라미를 비교하여 서열을 매길 수는 없지만,
1과 2를 비교하여 서열을 매기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결국, 숫자의 삶이란
쉴 새 없이 비교되며 서열이 매겨지는 삶인 것이다.
그렇다면 삶의 모든 것을 숫자로 측정할 수 있을까?
아이큐가 지혜를 측정할 수 없고,
친구의 숫자가 관계의 깊이를 증명할 수 없으며,
집의 평수가 가족의 화목함을 보장할 수 없고,
연봉이 그 사람의 인격을 대변할 수는 없다.
진정한 가치는 숫자로 측정되지 않는다.
그러니 만약 당신이 우월한 존재가 아닌
비교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싶다면
가장 먼저 삶에서 숫자를 지워야 할 것이다.
삶의 가장 중요한 것은
숫자가 담을 수 없는 것들에 있다.
우리는 그저 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고 살아갈 뿐이다.
그 삶이 부모님 기대에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부모님의 기대를 충족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건
사랑이 아닌 채무감이자 강박일 뿐.
내 삶을 책임지는 것이 나의 몫이라면
자식이 부모 마음대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건 부모님 몫이다.
우리를 짓누르는 것이
부모님에게 받은 경제적인 지원에 관한 채무감이라면
살며 최선을 다해 갚으시라
하숙비를 내야 하숙생이 되는 거다.
하지만, 우리 삶까지 저당 잡혀 살지는 말자.
우리가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애써야 할
유일한 존재는 나 자신뿐이다.
실패를 통해 길러낸 안목과 취향으로
내게 가장 좋은 한 가지를 찾아내자.
삶이란 결국 내게 가장 잘 어울리는
질 좋은 옷 한 벌을 찾는 일이다.
그녀에겐 단발머리가 진리라는 사실은
그에겐 댄디룩이 가장 잘 어울린다는 사실은
내겐 살구색 블러셔가 잘 맞는다는 사실은
새로운 시도를 통해 발견됐다.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이 한국과 일본에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단순히 잘 팔리는 정도가 아니라 불황인 출판계에 신드롬에 가까웠다.
왜 이 책이 한국과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을까?
두 나라는 '행복 연구'에서 중요성을 나타내는 국가이다.
높은 경제 수준에 비해 행복도가 눈에 띄게 낮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개인주의는 행복감을 느끼는데 중요한 문화적 특성으로
개인주의가 강할수록 소득과는 별개로 사회 구성원의 행복감은 높아진다.
반대로 경제 수준이 높다 해도 개인주의가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국가는
그에 상응하는 행복감이 따라오지 못한다고 한다.
초집단주의 사회인 한국과 일본이 이러한 경우다.
그렇기에 한국과 일본에서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이
신드롬에 가깝게 팔려나갔다는 건,
그만큼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하며 살아간다는 방증이자
집단주의에 살고 있는 우리의 피로도를 보여준 것이다.
우정의 기초와 세상에 대한 신뢰를 다져야 했던 그 시절,
우리는 더 좋은 대학, 더 높은 성적을 위해
경쟁적 대인관계를 독려받았다.
그건 타인을 신뢰하는 대상이 아닌 경쟁하는 대상으로 바라보게 했고,
우리의 공동체 의식을 말살시키며 사람과 세상에 대한 신뢰를 훼손시켰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초집단주의 사회임에도
OECD의 '공동체 지수'도, '사회적 관계'도 모두 꼴찌를 차지했다.
개인주의가 뿌리내린 서구사회보다도 공동체가 훨씬 빈약하다는 것이다.
그 의미는 여전히 강력하게 남아있는 집단주의 문화 속에서
타인의 시선에 맞춰 행동하지만,
그 시선에 어떤 신뢰나 유대는 없다는 뜻이다.
관계 속에서 질식할 것 같으면서도 고독한 낱개의 개인들만 남은 것.
그 사실이 우리를 힘겹게 한다.
만약 인간관계에서 한 톨이라도 손해를 참을 수 없게 되었다면,
사촌이 부동산을 알아보는 순간부터 아랫배가 아프기 시작했다면,
쉴 새 없이 승패를 나누고 있다면,
나도 모르게 경쟁적인 인간관계에 익숙해졌는지 모른다.
하지만 경쟁심은 우리를 녹초로 만들고 긴장하게 할 뿐
경쟁심이 경쟁력을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나 아닌 모두를 경쟁자로 여기며 자신을 달달 볶을 시간에
진짜 나의 일과 나의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김현철 정신과 의사는 헝가리, 일본, 우리나라의 공통점으로
'방황이 허락되지 않은 사회'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 세 나라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더 있는데
바로 높은 자살률이다.
우리나라에서 방황은 인생을 망치는 지름길이자 금기에 가깝다.
오죽하면 방황 청소년이라는 말까지 있을까.
대학 진학, 취업, 결혼, 출산, 내 집 마련 등 일련의 과정을
[적령기]라는 데드라인에 맞춰 완수해야 하고,
이를 위해선 잠깐의 방황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지 못했다간, 실망하는 부모님과 실패자로 규정짓는 수군거림과
사회적 고립에 대한 두려움을 피하기 어렵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자살률 최고, 출산율 최저라는
두 가지 지표를 갖게 되었다.
이 지표의 공통점은 생존과 번식이라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마저 포기한다는 것.
그만큼 우리가 이곳을 살만하다고 여기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두려움의 실체는 가난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존중받지 못하는 비참함과 고립감이다.
레오 보만스에 따르면 북유럽 국가들의 높은 행복감은
높은 소득이나 복지시스템의 결과가 아니라
넘치는 자유, 타인에 대한 신뢰, 다양한 재능과 관심에 대한
존중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반대 지점에 있다.
자유의 박탈, 획일적인 삶의 강요, 타인에 대한 불신.
나는 삶에 가장 중요한 것들만을 남기려 노력했는데,
큰 카테고리에서 보자면
일, 인간관계, 즐거움, 정신적. 신체적인 건강함이었다.
벌어지지 않은 일에 미리 불안해하지 않았고,
하고 싶은 일(Want)을, 할 수 있겠다(Can) 싶으면 했다(Do).
Want + Can = Do라는 단순한 공식.
대신 열심히.
책 목차 순서가 참으로 좋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나처럼
'내 방식대로 살고 싶어. (지금은 그럴 순 없지만...)'의
딜레마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일 것 같다.
그런 독자들에게 김수현 작가님은 이렇게 말한다.
(목차를 말하듯이 적어본다.)
나의 삶을 존중하며 살아가세요.
나답게 살아가도 괜찮아요.
불안에 붙잡히지 마세요.
함께 살아가려면 '나 답게 살아도 돼요'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라도 '나 답게 살아야 해요'
'나 답게 사는 것'이 좋은 삶, 그리고 의미 있는 삶이에요.
그래. 다른 사람들이 정해 놓은 틀에 나를 맞추지 말자.
나 답게.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자.
그게 나를 위하는 길이다.